올바른 '효'란 무엇일까?
“하룻밤만 신세 져도 되나?”
대학교에 군복학을 했던 2017년. 당시 나는 한창 20대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어느 날, 선배 A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내게 하룻밤만 신세를 질 수 있는지 조심스레 물어봤다. 2015년에 내가 입대를 했을 때부터 연락이 끊겼던 사이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새내기들을 잘 챙겨주던 인정 많은 선배였으니까.
“당연하죠 행님 저녁에 한잔하실까요?”
그에게 한잔하자며 자취방 주소를 알려줬다. 한 편으로는 ‘이 행님이 공무원 시험에 붙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시생이 친목 활동을 재개하는 시점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도 노량진에서 공무원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여튼 그는 곧 집을 찾아왔고 2년 만에 해후했다. 어느 사내놈들이 그렇듯 “오셨습니까. 행님” “그래, 오랜만이네”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특별한 것이라고는 5명이 같이 사는 방이기 때문에 더 북적북적했다는 정도다.
“행님 진주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오랜만에 만났으니 근황 토크부터 시작했다. 소주를 까면서 물었다. 만약 그가 공무원에 합격했다면 진심으로 축하해줄 생각이었다. 반대로 시험에 떨어져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왔다면 정신이 맑아질 수 있도록 같이 놀아줄 생각이었다.
“몸이 안 좋아서 잠시 쉬러 왔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다. 노량진에서 공부하는 동안 몸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자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약 없으면 숨도 쉬기 힘들더라고…”
공황장애. 선배가 앓고 있는 질병의 이름이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항상 의젓하던 그가. 밝은 모습을 보여주던 그가. 한창 20대인 그가. 약이 없으면 숨도 쉬지 못한다고 한다.
“방 하나 잡아놨다. 잠시 푹 쉬려고…”
심지어 이 인근에 원룸을 하나 잡았다고 한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단다. 대체 2년간의 공시생 생활이 어땠길래 사람이 이 지경이 됐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에게 대놓고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늘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그에게 상처를 줄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는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고생하고 계셔서 빨리 붙어야 하는데.”
그런데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다. 그가 부모님에 대한 걱정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모님을 위해서 공부한다고 말한다. 계속 낙방하는 2년간의 공시 생활로 인해 부모님께 죄스러움을 가지게 되었나 보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효자였다. 내가 새내기였던 시절에 그가 부모님의 일을 도우러 간다는 말을 몇 번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집안 경제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큰 것은 장담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너무 효자인 게 마음에 걸린다. ‘그에게 공황장애를 선물한 사람은 본인 스스로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착한 아들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압박하는 것 말이다.
‘네가 뭘 알아서 함부로 판단하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기에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공황장애 증상을 처음으로 겪은 시기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매미 소리가 귀를 어지럽히던 2002년의 여름. 당시 30kg 정도밖에 안 되는 몸뚱이를 이끌던 내 나이는 고작 9살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섬진강 변을 따라 나 있는 하굣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이놈의 하늘은 내게 특별한 하루를 선사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루한 하굣길을 걷고 있는 내게 앞뒤 문맥조차 없는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참으로 웃기다. 싸구려 삼류 소설조차 기승전결이 있기 마련인데 ‘기’의 ‘ㄱ’조차 없이 찾아온 고통이 내 심장을 옥죄었으니까.
“헉헉”
그렇게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채 헉헉거렸다. 그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30분? 1시간? 아니 실상은 그보다 훨씬 짧았겠지. ‘혹시 죽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에 빠진 내가 1분을 1시간으로 느꼈을 뿐이다. 다행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멀쩡해졌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집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다. 고통이 끝난 그 순간이 또 다른 시작을 나타내는 시작이였으니까. 그 이후로 나의 10대 시절에는 수많은 이상 현상이 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등과 가슴에서 5 ~ 10분간 지속되는 열감, 갑자기 전신에 흐르는 식은땀, 팔이나 다리에 탄산수가 흐르는 느낌, 공기 중에 산소가 없는 것처럼 아무리 숨을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답답함, 갑자기 멍해지는 현상, 내 이름 석 자와 집 가는 길이 기억나지 않는 현상, 침대에 누웠을 때 파도 위에 떠다니는 듯 세상이 출렁이는 현상, 학교에서 수업 듣던 도중 온 세상이 흔들려서 멀미가 찾아오는 현상 등. 내가 10대 시절 동안 겪은 이상 현상들이다.
당시의 나는 어릴 때부터 느꼈던 일들이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아니, 오히려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외가댁의 집안 내력으로 인해 신병을 앓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현상을 무속인의 관점에서 해석하곤 했다. 내 몸에 흐르는 기(氣)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덕이었을까? 20살에 재수를 하던 나는 점점 심해지는 이상 증상을 해결하기 위해 기(氣)수련을 하는 단전호흡 도장에 다니게 된다. 당시까지도 내가 겪는 현상들은 오로지 영적인 문제로 발생한 것으로 생각했거든.
단순히 ‘내 몸에 흐르는 기(氣)를 치료해야 한다!’라는 비과학적인 견해로 시작했던 단전호흡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효과가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氣)수련이 아닌 명상을 배움으로써 건강을 되찾았다. 단전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스스로를 관조해야 하는데 이게 명상과 비슷하다. (당시에 100% 완치된 것은 아니었다.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호전되었을 뿐이다. 완전히 좋아진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다.)
그럼 어떻게 좋아졌냐고? 고요한 새벽 5:30분부터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는 명상 시간에서 나의 작은 습관 중 하나를 캐치했다. 명상할 때는 특히나 잡생각이 많이 떠오르는데, 나의 잡생각 대부분은 부정적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한 생각을 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습관이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착각을 했었다. 그래서 항상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의도적으로 좋지 않은 생각을 끌어 올리곤 했다. 위장과 아랫배가 쓰릴 정도로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가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옛날 기억을 끄집어내야 한다. 내 머리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부정적인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다.
“쨍그랑”
산산이 조각난 차 유리창, 부서진 의자 다리, 엎어진 책상, 악을 쓰듯 오고 가는 고함, 집을 나가는 어머니,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다시 돌아온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이혼’
고작 9살인 내게 부모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는 세상 전부는 오직 부모였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 또한 몇 없었다. 고작해야 이불을 둘러쓰고 불안에 떨거나 집을 나가는 어머니를 쫓아가서 “엄마, 가지 마!”라고 떼쓰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유독 자식을 아끼는 부모님이었기 때문일까? 부모님은 끝끝내 이혼하지 않으셨다. 다만, 이혼 직전까지 갔던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될 뿐이었다. (당연히 행복한 날도 많았다. 현재도 굉장히 화목하게 잘 지내신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머리에는 싸웠던 날이 아주 크게 자리잡혀져 있었다.)
나의 학창 시절 동안 이어지던 부모님의 싸움. 그때마다 나는 작은 몸뚱이를 이불로 가린 채 눈물을 삼켰다. 사내놈이 눈물을 흘리면 쪽팔리니까.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한 채 숨어있었다. 더욱이 이러고 있는 나에 대해 부모님이 알게 되면, 그들이 슬퍼하실까 두렵기도 했다.
왜 그랬냐고? 우리 부모님은 좋은 분이시니까.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하루 3시간도 못 주무시고 일하셨다. 어머니는 일까지 하며 할아버지의 똥수발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중풍과 방광암 수술로 인해 사지마비 판정을 받고 인공 오줌보를 차고 계셨다. 더욱이 그런 어머니에게 혹독한 시집살이를 보여주는 할머니까지 계셨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런 환경에서 우리 부모님은 버티고 계셨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하지만, 부모님도 사람이니 힘드셨겠지. 그렇기에 그토록 싸우시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더 밝은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행복한 척, 가면을 쓰고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되었다. 두 분이 싸울 때면 항상 이불을 둘러쓰고 눈물을 삼켰다. 부모님의 목소리가 조금만 커져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전신에 식은땀이 났어도 말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일까?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는 루틴에 점점 적응되기 시작했다. 아니, 밤마다 지속되는 정신적 고통에서 편안해지는 법을 찾았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내가 죽으면 부모님이 안 싸울까?’
특이하게도 이런 극단적인 생각이나 부정적인 상상을 할 때 마음이 편해졌다. 사람의 감성이 고조되는 밤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중2병에 걸렸던 탓일까? 그 이유는 모르겠다. 이런 멍청한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옥죄어 오는 가슴의 압박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극단적인 상상은 꽤 다양했다. 섬진강 변을 따라 나 있는 등굣길에서 강에 뛰어내리는 상상부터, 내 몸에 칼을 꽂는 상상까지 말이다. (물론, 실제로 행동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 정도의 용기가 없었거든)
그런데 더 웃긴 점이 있다. 이런 내가 겉으로는 밝은 척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 속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다는 불안감이 그 이유였다. '이런 습관이 결국 공황장애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선배 A의 지극한 효심이 신경 쓰였다. 부모님을 위해 꼭 공무원에 붙어야 한다는 그의 말 때문이다. 그의 모습에 내 어린 시절이 대입되어 보였다. 부모님을 위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스스로를 아프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과연 올바른 ‘효’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떠오른다. 부모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희생이 과연 올바른 ‘효’일까?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내 아픔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을까? 부모님을 위해 공부한답시고 자신을 괴롭혔던 것은 올바른 행동일까? 선배 A는 부모를 위해 공무원에 붙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통 속에 허우적대는 모습은 자식이 행복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닐까?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부모를 위해 안정적인 삶을 택하여 살아야 하는 게 올바른 ‘효’인지. 부모가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자식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나’의 삶을 사는 게 올바른 ‘효’인지. (여기에서의 행복이란, 부모가 믿고 있는 행복이 아니다. 나 스스로가 행복이라 여기는 가치를 말한다.)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 이후로 연락이 끊긴 선배.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런 질문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