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내 탓임을 깨닫자, 공황장애가 완전히 사라졌다.
군대는 신병훈련소에 입소할 때부터 부모님의 눈물을 뒤로한 채 나아가야 하는 곳이다. 사회와 단절된 약 2년의 공백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는 정반대였다. 군 복무 시절 동안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마음 가득히 채우고 있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2014년 집에서 가출했을 때부터 생긴 원망이 더욱 증폭됐다. 그리고 그 원망의 그래프가 상한가를 찍었을 때는 내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다. 당시 나는 병장이었고 사지방(사이버지식정보방)에서 SNS를 하다가 우연히 공황장애 증상에 관한 글을 읽게 된다.
‘부정적인 상상을 할 때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가슴에 열감이 느껴진다.’
‘가끔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증상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이상 현상이었는데, 이전까지의 나는 몸에 흐르는 기(氣)에 문제가 생겼기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무당이 겪는 신병(神病)처럼 말이다. 실제로 단전호흡이라는 기(氣)수련을 배우면서 이상 증상이 호전되었기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氣)의 작용보단 명상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치유한 것이 도움 됐다. 완치는 아니었지만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정도까지 좋아졌거든)
그런데 아니었다. 그냥 정신병이었다. 당시 멍청했던 나는 이 화살을 전부 부모님 탓으로 돌리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부부싸움을 보며 자랐던 게 원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님 때문에 내가 아팠던 거야!’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생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학창시절 때 내게 검사가 되길 강요했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피해의식을 느꼈다. 정확히는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 나를 가스라이팅 했다’라는 오해를 하게 됐다. 오로지 자식이 행복하길 바랐던 부모의 마음을 모른 채, 세상 전부를 부모님 탓으로 돌리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말년병장 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부모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채로 전역을 하게 된다. 몹쓸 감정을 품고 있는 놈이 나왔으니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하리라. 부모님을 바라보는 눈빛부터가 아니꼬웠으니까. 심지어 잠시 도와달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 방에 처박혀 있는 건 기본이었다. 촌에서 자영업을 하시는 부모님의 특성상, 자식은 집에서 5분 대기조가 될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나는 후레자식이 되었다. 부모님의 집에서 부모님이 차려주신 밥을 먹고 부모님이 사주신 옷을 입은 채 속으로는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런 자식놈을 보고 계셨을 부모님은 어떠셨을까? 당신을 대하는 태도와 눈빛만 봐도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눈치채셨을 텐데, 자식놈을 먹여 살리겠다고 고생했던 지난 세월이 허무하지는 않으셨을까? 할아버지의 똥 수발을 들며, 고된 시집살이를 버티신 어머니의 삶과 하루 3 ~ 4시간도 못 주무시고 일하신 아버지의 세월이 그냥 흘러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도 당시 부모님은 내게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다. 아니, 뭔가를 말씀하려고 하셨던 것 같긴 하다. 다만, 그 당시의 나는 귀를 닫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게 맞다.
나 하나로 인해 집안 전체가 불편해지고 있었다. 평생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겠지만, 다행히 내 몹쓸 생각이 사라지는 계기가 찾아온다.
그날은 전역한 지 2달이 지난 2016년 12월이었다. 평소와 같이 아버지께서 도움을 요청하셨지만 나는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방안에 누워있었다. 그러자 당시 19살이었던 내 동생이 마당에 아버지를 도우러 나갔고 곧이어 아이스박스를 테이핑하는 소리가 방안에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일은 가공·포장한 재첩국을 아이스박스에 담아서 택배로 부치는 업무인데 택배량이 많을 때는 혼자서 하기 굉장히 고된 작업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겹도록 듣던 소리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속이 뒤틀려져 있었기 때문일까? 그 소리가 내 귀에 맴도는 순간, 남의 방귀 소리를 듣는 것처럼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냥 평범한 일상이었을 뿐인데도 그랬다.
곧이어 부자간의 대화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장난을 치고 있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동생과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어지럽혔으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오는 웃음소리였지만 그 느낌이 달랐다. 미소로 된장국이라도 끓였던 것일까? 그 웃음소리가 유독 행복하게 들렸다.
‘동생은 부모님이 원망스럽지 않을까? 어째서 저렇게 웃을 수 있지?’
행복해 보인다면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중2병에 몸을 푹 담그고 있던 나는 그 행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같은 가정환경에서 살아온 동생이 어째서 나와 다르게 행복해 보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한 수많은 잡념이 떠올랐지만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머리털만 쥐어뜯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하늘이 나의 노고에 감동했나 보다. 군대 말년 휴가 때 동생을 만났던 일이 기억났다.
당시의 나는 장장 8시간 동안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며 하동에 도착했다. 나의 도착 일정을 대충 알고 있던 동생이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밥을 먹으러 갔다. 식당에서 대충 주문을 마치자, 나는 말문이 터졌다.
그런데 군 복무 시절 동안 속에 응어리를 키우고 있었던 탓일까? 내 입에서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사실 내가 공황장애를 겪었었고, 이러저러해서 힘들었다” 그런 식의 이야기 말이다.
가족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다 보니,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내 말을 듣고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돈가스를 자르던 동생이 입을 열었다.
“난 항상 행복했는데”
자신은 행복했단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기 싫었을까? 아니면 부모를 욕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저 행복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당시 동생으로부터 저 말을 들었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그런데 머리가 복잡해지자 저 말은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나도 행복한 시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모를 원망하고 나 혼자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다고 자해하고 있었지만, 사실 나의 10대 시절에는 행복한 시절이 훨씬 더 많았다. 한 식탁에 가족 전부가 모여서 어머니가 끓여주신 된장국을 먹고 하하호호 웃으면서 참외를 깎아 먹던 평범한 일상의 행복 말이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동생에게도 나와 같은 아픔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행복하다고 한다. 그럼 문제의 원인은 부모님이 아닌 내게 있다는 뜻이겠지.
'그럼 뭐가 문제일까? 동생과 나는 뭐가 달랐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진로’이다. 어머니는 내게 검사가 되라고 하셨지만, 동생에게는 제발 4년제 대학교만이라도 가라고 하셨다. 차별 아니냐고? 뭐, 어떻게 보면 차별일 수 있겠지. 하지만 부모님 입장에서는 내가 유일한 희망이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우리 집안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으니까. 부모라면 한 번쯤 기대를 걸 수도 있었을 테다.
그렇다면 이게 뭐가 문제라고? 당연히 문제다.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잘나 보이는 게 국룰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우리 집안에서 가장 공부를 잘한다.’라는 타이틀은 아무짝에 쓸모없다. 내 모의고사 성적은 고작해야 3등급이었으니까. 전국단위로 갔을 때는 아주 평범한 놈일 뿐이다.
그런데도 부모님이 계속해서 내게 기대하셨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내가 착한 아들 코스프레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나는 착한 아들이 맞았다. 10대 시절의 나는 부모님 말씀을 거스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놈의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졌다. 도대체 이런 수능 공부는 왜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깔끔하게 공부를 포기했으면 되었을 테지. 그런데 그것도 못했다. 나는 못된 아들이 될 용기가 없었거든. 자세히 말하자면, 착한 아들이 되고 싶기는 하지만 공부는 하기 싫은 모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찾아낸 결론을 결국 ‘착한 아들 코스프레’다. 게임도 하고 만화도 보고 할 짓 다 하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항상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척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부모님도 고통이지 않았을까? 이런 행태는 말 그대로 ‘희망 고문’에 불가하니 말이다.
그러면 동생은 어땠을까? 동생은 나와 달랐다. 애초에 ‘공부로는 답이 없다’라는 인식을 주었다. 썩 어감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부모님께 희망 고문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나보다 효자이지 않은가 생각한다. 나는 나쁜 아들이 될 용기가 없었기에 동생처럼 하지 못했다. 그저 코스프레만 하며 시간을 축냈을 뿐이다.
두 번째, 나는 솔직하지 못했고 쿨하지 못했다. 부부싸움을 하시는 부모에게 내가 힘들다고 한마디만 했으면 됐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혼자서 끙끙 앓고 망상에 망상을 더해 병을 키웠다. 그게 아니라면 ‘부모님은 부모님의 인생을 사십쇼. 저는 제 삶을 살랍니다~’라는 쿨한 생각을 가졌어야 했다. 하지만 이것 또한 하지 못했다. 결국, 공황장애를 만들고 키웠던 것은 오로지‘나 자신’이었다.
세 번째, 선별적 회상이다. 불행했던 순간만을 모아놓고 ‘나는 항상 불행했어!’라고 외치던 멍청이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물론, 불행하고 아픈 순간도 있었다. 허나 그건 전부가 아닌 일부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자면, 불행했던 순간보다 행복했던 순간이 수십·수백 배 더 많다고 말할 수 있다. 그저 아픔 또한 소중한 나의 과거이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도 있는 것임을 알았어야 했다. 세상에 행복하기만 한 무릉도원은 없으니까.
이 세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곧 부끄러움과 부모님에 대해 죄스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느꼈던 고통은 전부 내가 만들어낸 허상인데 감히 부모를 탓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나를 괴롭히는 주범이 나 자신임을 알았으니까. 더 이상 나를 괴롭힐 필요가 없었다.
그 이후로 공황장애 증상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가슴에 열이 나거나 식은땀이 흐르지 않고 호흡도 편하다. 당연히 부정적인 생각으로 나를 괴롭히지도 않는다.
역시 다 내 탓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