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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Dec 26. 2023

같이 또 따로 산 순간들

성준이가 없는 밥상도 이제 10년이 되어간다. 처음 몇 년은 시간이 멈춘 줄 알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 멈춰있다 생각했던 시간도 흐른다. 겨우내 얼어 있던 시냇물도 얼음아래 물이 흐르듯 내 얼어붙은 시간도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10년이란 시간은 길었다. 그 10년이라는 사이에 둘째, 셋째가 태어났다. 그러고 보니 내 큰아이만 삼촌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 삼촌의 선물을 받은 유일한 아이다. 


성준이는 큰아이에게 커다란 원목 키친 놀이세트를 선물로 주었다.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첫째와 한참을 놀아주었다. 그리고는 며칠 지나지 않아 택배로 커다란 원목 놀이가구가 왔다. 둘째 셋째까지 그 놀이세트로 놀았다. 아이들은 어디서 났는지 모르지만 키친 놀이세트가 있었다. 올해 들어서야 겨우 너무 낡아지고 부서진 키친 세트를 정리했다. 


벌써 몇년 전부터 버릴까를 고민했지만 차마 동생의 흔적을 지우기가 미안해 버리지 못하고 안고 살았다. 성준이는 둘째 태어나기 두어 달 전에 생을 마쳤다. 내 둘째와 셋째는 삼촌을 만나 본적도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다. 집에서 성준이의 이야기는 금기어는 아니지만 잘 꺼내어지지 않는다. 웃으며 이야기할 수 없기에, 꺼내어 놓으면 한숨과 눈물이 따라온다. 성준이의 이야기는 본의 아니게 비밀이 되었고, 아이들은 아빠의 형제가 있었는지 조차 잘 모를 수도 있다. 아마 잘 모를 것이다. 



성준이는 눈치도 있고, 센스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는 안 했지만 자신만의 전략으로 인서울 대학을 갔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전공을 버리고 프로그래머로 전향을 했다. 그만의 이유가 있었는데 또 그 이유가 통했다. 게다가 나름 센스가 좋아. 제법 높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연봉협상을 할 때면 밀당을 잘해서 남들보다 연봉 상승률도 높았다. 앞을 내다보는 시야가 좋았다. 동생으로만 생각했을 때보다 사회인으로 바라본 동생은 그래도 쓸만한 인재다. 내눈에는 사고뭉치 동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회 속에서의 성준이는 까칠하지만 일은 잘하는 차도남 같은 느낌이었다. 성준이의 장례식에서는 고향친구, 사회친구, 회사 동료들 그렇게 많은 조문객이 온 장례식은 오랫만이었다. 집안에서는 건강이 염려되는 말 안듣는 막내였지만 집 밖에서의 성준이는 제 한 몫을 제대로 하는 사회인이었다. 가족들의 눈에만 철부지 아이처럼 보였나 보다. 


성준이가 졸업을 하고, 직장을 잡았을 그 무렵 우리는 신촌으로 이사를 했다. 이번엔 내 학교가 가까운 곳이었다. 방 두 개 화장실 하나의 빌라 1층. 필로티 구조라 1층이어도 2층 같아 좋았다. 이곳에서 7년 중 4년을 함께 살았다. 


이때의 문제는 나였다. 고등학교 때 공부 좀 했다고 자만했어 그랬을까? 취업시장에서도 잘 통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 이전에 나는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방송국 취업만을 생각했고, 학과, 시험, 취업 등 모든 준비를 방송국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나의 뚝심 어린 고집은 그렇게 나를  백수로 만들었다. 호기 있게 떨어졌고, 한 해만 더 준비하기로 했다. 동기들이 넥타이를 메고 출근하는 것을 보니 멘털이 흔들리긴 했지만, 넉살 좋겠도 그 넥타이 맨 동기들을 찾아다니며 술을 얻어먹기도 했다. 동기들에게 술을 얻어 마시면서도 자존심에 뭐가 되던 이길로 나아가야겠다 다짐했다. 이제 남은 건 이것 말고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해의 성적은 좀 더 좋았다. 지원자가 4천쯤 되었고, 6명의 최종 면접까지 올랐다, 다 왔다고 생각했던 고지 앞에는 생각보다 큰 장애물이 있었고, 나는 그걸 넘지 못했다. 또 백수가 되었다. 같은 자리로 돌아왔는데.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모든 것에 대한 의욕과 자부심, 자존감, 모든 것이 위축되었다. 내가 집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성준이는 직장을 다녔다. 성준이는 나와의 시간을 따라잡았다. 군면제와 늦지 않은 취업은 내가 성준이보다 앞서 있던 모든 시간의 간격을 없애버렸다. 이제 나와 성준이는 차이가 없다. 둘 다 사회인이었다. 돈을 버는, 그리고 돈을 벌지 못하는 


"형~ 내가 치킨 시켰다. 오면 받아놔. 먼저 먹던가"

"오냐. 니 옷 세탁소 맡겨 놨으니 시간 되면 찾아오고, 못찾아오면 나한테 말해 놓고"

"분명 나 잊어버릴꺼야 형이 좀 찾아다 줘"

"그래 그럼 술좀 작작 드시고"


평화로웠다. 각자 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서로 바쁜 만큼 부딪힐 일이 없었다. 일에 학업에 바빠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자는 형태였고, 집안일들의 나눔은 이제 익숙해졌다. 집에서 공부하는 놈이 집안일을 하는 게 당연했다. 혼자 청소하고 빨래를 하면 성준이는 때때로 치킨이며, 족발이며, 맥주들을 사 왔다. 일이 자연스레 분배가 되고 싸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성준이의 건강은 표면적으로 나빠지는 것도 없었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것도 직장인이면 으레 그러려니 하는 수준처럼 보였다. 우리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친구를 만나고, 연애를 하고, 학업을, 직장을 다니며 살았다. 어쩌면 이 순간이 나와 성준이가 가장 평화롭게 공존하던 시기였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서로의 생활과 삶을 받아들였고, 서로에게 각자의 삶이 있었다. 



이 평화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나는 직업을 가졌다. 그토록 되고 싶었던 피디가 되었다. 이전보다 더 바빠졌고, 집에 잘 들어오지도 못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나는 연애를 했고, 결혼도 했다. 나의 결혼과 함께 우리는 따로 살게 되었다. 7년을 함께 살았었다. 


난 염치없게도, 함께 살았던 집의 보증금을 가지고 신혼집을 꾸렸다. 결국 성준이는 더 작은 집을 구해 이사를 나갔다. 


본인이 살집을 구하는데 귀찮아 하는 성준이를 대신해 우리 부부가 구해준 집은 원룸이었다. 일단 예산이 너무 빠듯했기에 구할 수 있는 집 자체가 없었고, 그나마 신축에 깔끔한 스타일의 원룸으로 타협했다. 집은 깔끔했지만 너무 작았다. 이전에 함께 살던 집에는 거실과 방이 2개 앞 뒤의 베란다까지 있어 햇빛이 잘 들어오는 빌라였는데 원룸은 너무 작았다. 답답해 보였다. 조금 미안했다. 


"내가 도련님을 그런 집을 구해드린 게 너무 후회되. 나 때문에 도련님이 힘드셨을 것 같아서 미안해"


성준이를 보내고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아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내도 나만큼 마음이 아플거라는 걸 생각 못했다. 나만 힘들거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이기적이었는지 모른다. 모두가 아팠고, 모두가 지난 날을 후회했다. 



당시 우리 부부는 결혼을 하고, 몇 번의 이사 끝에 미분양의 회사 아파트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전세로 살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한참 멀어져야 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방도 넉넉하고 집도 넓었기에 성준이 한 명 더 함께 사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심지어 화장실도 2개나 되니까. 문제는 성준이의 직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때문에 함께 살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우리부부는 그 때를 여전히 아파한다. 조금더 우리가 용기를 내었다면, 먼저 말이라도 꺼내 보았다면 여전히 그 밥상을 함께 하고 있을지로 모른다는 생각이 몇 년간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은 힘들다. 어렵다. 아프다. 무슨 생각을 하고 되짚어도 잘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모든 일 하나하나가 아쉽다. 다 나의 잘못같다. 


나는 2014년이후로 나는 기억을 헤아리는 방법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년도를 기억했다. 99년도에 대학을 갔다. 2000년도엔 군대를 갔다라는 식이었다면 14년도 이후로는 앞 뒤가 바뀌었다. 결혼을 한 해는 2010년도, 큰아이가 태어난 2011년도. 그리고 세월호가 가라앉고, 아내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성준이를 잃은 해 2014년도. 


2014년도는 참 많은 사람들에게 아픈 해였다. 4월에는 생때같은 아이들을 바다에 묻었다. 이를 실시간으로 온 국민이 바라보았고, 배가 완전히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순간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아파했고 분노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와이프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85세의 연세로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일주일 가량을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계시다 소천하셨다. 아픔과 상실감이 쉬지 않고 몰아치던 해였다. 그리고 그 아팠던 시간들이 이제는 무사히 지나가려 한다고 믿을 때쯤 일이 생겼다.


그날은 11월 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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