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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Jun 20. 2024

'라떼파파'이름 만큼 달콤하지만은 않은

한 손엔 커피를, 다른 한 손엔 유모차 손잡이를 잡은 아빠를 가리키는 말로 육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아빠를 의미한다. 선구적인 육아휴직제로 인해 육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아빠들이 대거 생겨난 스웨덴에서 유래했다. 스웨덴은 1974년부터 여성 인력 활용의 중요성을 깨닫고, 세계 최초로 부모 공동 육아휴직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이러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정책이 사회 인식과 조직의 기업문화를 바꾸었고 남녀 공동육아 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 산물이 바로 라떼파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떼파파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한 손에는 테이크 아웃을 한 부드러운 카페라떼, 다른 한 손에는 핸들링이 좋은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젊고 깔끔한 옷차림의 아빠. 아기띠를 해도 엄마가 한 것보다 훨씬 안정감 있고, 폼도 나는 그런 아빠를 상상했었다. 아이와 함께 나온 산책에 주변 사람들은 친절한 미소와 귀여운 아기를 만져보고 싶어 하는 그런 주변을 상상했었다. 내가 생각했던 육아 하는 아빠의 모습은 이런 모습들이었다. 그랬다. 나는 육아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 아빠였다. 그 엄마보다 체력 좋은 아빠가 아이와 쉬지 않고 놀아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이의 분유정도야 먹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아이를 키우는 일이니 당연히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우아~ 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세상 당연한 진리를 잊고 있었다. 

당연하게란 건 없다. 공짜로 얻어지는 것도,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나는 육아의 1도 모르고 있던 셈이었다. 나의 육아는 라떼보다는 씁쓸한 아메리카노와도 같았다. 배울 것도 익혀야 할 것도 감당해야 할 일도 너무 많은 영역이었다. 모든 것이 낯선 일이었다. 



아메파파가 깨달은 육아의 고단함  


의.식.주. 모든 것이 육아를 기점으로 달라졌다. 

내가 입는 옷은 더이상 타인을 위해 입는 옷이 아닌 육아를 하기 위한 전투적인 복장이 되었다. 쉽게 움직이기 편한 옷. 세탁이 용이한 옷이 선택의 우선사항이 되었다. 내가 먹는 음식은 이제 더이상 나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아니게 된다. 모유 수유를 했던 아내는 아이를 위해 맵고 짠 음식들을 멀리했고, 본의 아니게 건강식에 가까운 식단이 되었다. 가족을 위한 일이지만 삶의 재미 하나를 빼앗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거주 공간의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는 안녕. 신생아 용품으로 주방과, 거실, 방의 침대 구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물품들이 하나하나 늘어나면 마치 땅따먹기에서 더이상 갈곳없는 초라한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가구의 모서리는 폭신한 가드로 본래의 아름다움은 덮혀버렸지만, 아이의 상처가 늘지 않을 거라는 안심으로 만족해야 했다. 육아는 본의 아니게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기준점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커다란 변화 외에도 삶의 소소함들이 많이도 달라졌다. 생각나는데로 나열해도 정말 책한권이 되겠다. 


첫 번째. 테이크아웃 커피? 난 멋진 꿈을 꾸었던 것이다. 육아를 하다보니 커피숍 갈 시간이 없다. 아니? 집안에서 캡슐 머신도 제대로 내려 마실 시간이 없다. 그나마 신생아 시절에는 울고 보채기는 해도 위험한 것을 만지거나 돌아다니질 못하니 나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쉬지 않고 기저귀를 적시는 탓에 기저귀를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히는 것만으로도 내 정신은 쏙 빠져 나갔다. 그리고 곧 숙련공 급의 스킬이 완성되었다. 그때까지는 어린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불안하니 집에서 캡슐 커피를 마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커피를 내리고 향긋한 커피 향에 육아의 우아함도 잠시 느끼곤 했다. 하지만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느새 배밀이를 시작해 기어다니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캡슐 머신도 상상하기 어렵다. 눈을 떼면 순식간에 어디론가 기어가 잡고 일어서거나, 눈에 보이는 데로 입에 넣거나 하는 통에 눈을 떼기 불안하다. 이때부터 아이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미어캣이 되어야 한다. 고개를 아이에 고정한 나의 삶은 점점 아이의 삶에 동화되어 간다. 


두 번째. 내가 고등 교육을 받은 인재였던가? 점점 사용하는 단어들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변한다. 

-오르르르 까꿍~ 크롱크롱~ 에베베베베- 

30대 초중반의 고학력의 사회인이 사용할 법한 단어들은  잊은 지 오래다. 경제가 어쩌고 문화가 어쩌고 전략이며, 마케팅이며, 콘텐츠 같은 고오급 스런 단어들은 사용할 때가 없다. 동물 소리, 공룡이름, 애니메이션 캐릭터 이름을 훨씬 더 많이 부르게 된다. 아이가 잠들기 전까지는 뉴스를 보기 보다는 뽀로로, 크롱, 포비와 만나는 시간이 훨씬 많다. 이런 삶이 익숙해지다보니, 아이가 잠들은 육퇴후에도 더 이상 뉴스를 찾아보지 않게 되었다. 사람은 환경이 적응하는 동물이 맞는 것 같다. 


세 번째. 옷차림

아이와 커플룩을 입고, 깔끔한 옷차림으로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물론 처음의 몇번은 그렇게 나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한번 아이를 데리고 나갈 때 챙겨야 할 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을 후 부터 점차 그 빈도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이과 한 번 외출을 하려하면 챙겨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여벌 옷과 기저귀, 아이의 음식들과 안전을 위한 유모차와 각종 장난감들. 모든 먹고 마시는 것들을 챙기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 진다. 단순한 외출이라도 보통 가방 한 가득 차는 것은 보통이다. 그러다 보니 점점 횟수가 줄어들고 집에만 머무르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집에만 있으니 깔끔한 옷이 무슨 소용인가. 게다가 아이가 얼마나 자주 토를 하는지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내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었다 생각했던 아이는 어느샌가 내 어깨에 하아얀 우유 자국을 남겨주곤 했다. 마치 어깨위의 우유 자국은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표식이 된 것마냥 각인되었고, 나는 점점 편한 옷만 찾게 되었다. 어쩌다 집 밖을 나서도 아이를 깔끔하게 입히는데 지쳐 난 움직이기 쉬운 트레이닝 복만 찾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네 번째. 체력 

아빠이기에 엄마보다 체력적으로는 우위에 있을거라 믿었다. 군대도 다녀왔고, 평소 며칠 밤을 세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에 분명 체력적으로는 엄마 보다는 나을거라 믿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체력소모가 너무 크다. 일단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신생아는 두세 시간 간격으로 분유를 먹고, 그 사이사이 기저귀를 간다. 육아란 퇴근이 없다. 특히나 신생아기에는 하루 밤을 오롯이 잠드는 것이 소원일만큼 아이는 부모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수유로, 기저귀로, 잠투정으로 몇 시간 간격으로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는 때때로 미워지기 까지 한다. 피로는 예쁜 아이의 얼굴마저도 외면하게 만든다. 체력 좋은 아빠들도 육아보다 밖에서 일하는 게 더 수월하단다. 그걸 엄마들이 하는 거더라. 


다섯 번째. 한국 사회는 아이에 대해 관대하면서도, 눈치를 보게 한다. 

아직 한국 사회는 아직 "아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는 관대함과 "맘 X"과 같은 날카로움의 이중 잣대가 있다. 아이니까 마냥 관대하리라는 기대는 접은 지 오래. 하루가 멀다하고 오르내리는 기사를 보면 아이들의 귀여움은 오로지 부모의 몫일 뿐, 타인에게 아이들은 예의없고, 시끄러운 존재로만 보이는 듯 하다. 물론 내 아이만을 위해 타인의 평안함을 무시하는 처사를 행하는 부모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몇 마리의 미꾸라지들이 온 개울을 흙탕물로 만들고 있다. 요즘은 그 미꾸라지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만 같아 더욱 조심 스러워진다.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기 위하여 말이다. 혹여나 식당이나 카페에서 눈총을 받을까 아이가 조금만 칭얼거리거나 울게 되면 들쳐 안고, 구석으로 가거나 가게를 나서길 반복하게 된다. 아무도 주의를 주거나 직접적으로 항의를 받은 적은 없지만 간혹 뉴스로 접하는 민폐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더 조심하며 행동하곤 한다. 어디를 가서 맘충과 같은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만큼 행동 반경이 제약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와 함께라면, 가야 할 곳, 피해야 할 곳들이 나도 모르게 선이 그어진다. 그렇게 신경쓰는 만큼 점점 육아가 외로워 진다.


마지막. 육아 휴직을 하는... 아니 집에 있는 아빠들은 그 숫자가 적지 않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간혹 아이를 어린이 집을 등하원 시킬 때를 보면 아빠들이 제법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중에는 직장 출근 전이거나 직장에서 서둘러 돌아온 것 같은 옷차림의 아빠들도 있고 나처럼 전업으로 아이를 돌보는 듯한 옷차림의 아빠들도 있다. 입고 온 옷차림이나 풍기는 냄새가 서로를 알아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아빠들은 아이들의 등하원 시간이 아니면 잘 볼 수가 없다. 평일 낮에 아파트 주변의 커피 숍이나 동네 마실 장소에 삼삼오오 모여 육아의 정보를 나누는 엄마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아빠들은 그렇지가 않다. 아마도 어디에선가 꼭꼭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집밖으로 나서질 않기도 하지만 가끔 낮에 볼일을 보기 위해 아파트 단지나 어딜 다녀보아도 나와 같은 사람은 찾기 어렵다. 나처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오질 않던가 혹은 밖에 나올 때는 철저히 사회인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성이라는 성별이 행동에 어느정도의 제약과 선입견을 가져다 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반대 위치에서 그 시선을 오롯이 감당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지만, 때때로 그런 시선들이 불편해 마지못해 위장을 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명퇴를 당한 아빠가 매일 아침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것들. 간단한 볼일에도 신경써 차려입은 복장으로 일을 보러가는 남자들. 낮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편한 복장의 아빠들도 어쩌면 사회인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아할 것 같은 라떼파파는 씁쓸한 아메리카노가 되어 나의 정신을 번쩍 깨웠지만 무를 수도 되돌릴 수도 없게 되었다. 마치 홈쇼핑에서 완벽해 보였던 팬츠가 입어보니 다리가 너무 길어 한참을 잘라내야 했던 것처럼 이상과 현실은 그 차이가 분명했다. 냉정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내 선택이면서도 스스로 적응하지 못했던 시간들도 분명 존재했고, 받아들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육아를 했던 모든 시간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씁쓸한 아메리카노에서도 향긋한 커피 향이 느껴지거나 부드럽게 나를 깨운 날도 분명 많았다. 기대만큼 부드럽고 고소한 맛의 라떼파파는 아니지만 씁쓸하면서도 향긋한 향이 나는 아메리카노 정도의 풍미는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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