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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May 29. 2024

chap64. 누구의 눈높이에 맞출 것인가

 p 202-204 <김은경, 에세이를 써보고 싶으세요?>


자신의 글을 읽은 사람이 일반 독자인지,
전문 지식을 가진 동종업계의 사람인지를 빠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한 가지 불편한 것이 있다. 단지 아이 셋 때문에는 아니다. 아이들의 각각의 나이차이 때문이다. 나의 삼남매는 유치원, 초등학생, 중학생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3-40대의 서너 살 차이야 그렇게 커다란 문화적인 차이를 느끼기 쉽지 않겠지만, 유아기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는 1년의 차이가 꽤나 크다. 특히나 초중고 생활에서는 1년의 차이가 신체적인 차이뿐 아니라 쓰는 말과 노는 문화적인 차이까지 두드러지게 한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쓰는 말과 하는 행동이 다르다. 게다가 이쯤 되면 알고 있는 지식의 차이도 현저하게 차이를 드러내는 시기가 된다.


중학생에게 말하듯 초등학생에게 말하면, 질문으로 돌아온다. 내가 설명하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묻는 질문이 이어진다. 원리를 설명하자면 공식이 아닌 원리적인 접근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 원리적인 접근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선조들이 세상 이치를 설명할 과학 원리나, 지식을 발견하고 설명해 주셨어도, 아직 그에 맞는 배경지식이 모자란 아이들에게는 호그와트 마법과 같은 존재인 셈이다.


하늘은 파란데 왜 노을을 빨갛게 보이느냐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의 질문에 빛의 산란을 설명하는 것은 몇 점짜리 아빠가 될까? 어쩌면 그 아이에게는 빛의 산란보다는 넘어가는 저녁해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 거라는 설명이 더 기억에 남지 않을까? 확실한 것은 전자의 설명은 아이에게 이해도 되지 않고, 기억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난 집에서 네 가지의 언어를 사용한다. 가장 단순하고 쉽게, 분명하게, 그리고 인내심 있게 설명해야 하는 언어 그 대상은 6살 남자 막둥이의 언어. 궁금한 것도 많고, 엉뚱한 생각도 많은데 기본 지식은 아직 조금 부족해 되도록 디테일하고, 쉬운 단어로 설명해야 하는 초등 저학년 작은 딸의 언어. 기본 지식은 어느 정도 갖췄습니다. 제게 이해되는 설명을 해주십시오.라고 눈을 반짝이는 중학생 큰 딸은 궁금한 점에서 딱 포인트만 짚어줘도 맥락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가장 고차원적인 와이프의 언어. 꿀떡 같이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들어야 한다. 단어의 정확성보다는 예전의 기억과 경험치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왜 우리 저번에 갔던 거기.. 그래 거기가 어디지?"

"아 그 커피숍 소금빵 맛있었던?"

"아니 거기 말고, 그 왜 있잖아. 셀카 찍고, 그 왜 브런치 먹었던"

"아. 갤러리랑 같이 있던데?"

"응 그래 거기 맞아 거기 이름이 뭐지?"

"아!! 나도 기억 안 난다 ㅠ"


한 가정에서도 대상에 맞게 쓰는 단어와 설명하는 방식, 말하는 주제가 달라진다. 고차원적인 대화를 해서가 아니라 대화는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상대에 맞춰 그 내용과 설명을 맞추는 셈이다. 그럼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좀 더 쉽게 받아들이고 신뢰하게 된다. 소위 맞춤 설명과 대화법이다.


우리가 하고픈 말들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 글을 썼을 때는 딱히 대상을 정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이야기를 "그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편하게 말하곤 했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는 40대의 연령대가 주 독자층이다. 40대 중반이 말하는 흥미롭고, 재미난 이야기는 같은 연령대가 공감하기 쉬운 법이니까.


만약 나의 글이 사춘기 학생들을 위한 설명이나, 조언이었다면 나는 지금처럼 글을 써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좀 더 쉬운 언어로, 간결한 문장으로, 그들의 예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의 단어를 골랐어야 할 것이다. 전문가를 위한 글을 쓴다면, 세세한 설명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나 배경 공식에 대한 주석은 필요치 않을 수 있다. 그래야 글이 더 직관적이며, 지루하지 않은 글이 될 것이다. 물론 초보자가 보기에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독자를 정해놓지 않은 글을 쓰기 쉽다. 글을 처음 쓸 때 대상을 정해서 쓴 다는 것 자체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가장 편한 언어로 글을 쓰게 되고, 그래서 자신과 가장 비슷한 연령과 취향의 독자를 만나게 된다. 만약 독자층을 달리하고 싶다면, 글을 읽을 대상이 정해져 있는 글이라면, 우리는 독자들과 마주 앉아 있는 셈이다. 내 앞의 독자와 가장 잘 이야기가 통할 언어로 말을 해야 한다.


어린아이와의 대화를 위해 무릎을 꿇는다. 키가 큰 사람을 위해 까치발을 하기도 하고, 시선을 올려 눈을 맞추기도 한다. 모두 좀 더 자연스러운 소통을 위한 노력이다. 글은 문자를 매개로 하는 대화다. 언어에 대해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느린 대화법이지만, 분명한 것은 작가와 독자와의 대화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원활한 대화를 위해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글도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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