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중병보다 내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픈 법.
살아가면서 새삼 깨닫는 것은, 인간은 결국 자신의 아픔이 가장 크다는 사실이다.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죽어가고, 전쟁이 벌어지고,
아이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목숨을 잃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내 통장의 잔고를 걱정하고,
회사에서 들려오는 상사의 한 마디에 분노하고,
하루 종일 기분을 망쳐놓는 사소한 일에 더 신경을 곤두세운다.
누군가는 40평대 아파트를 소유하고, 할부금 없는 고급차를 타며,
골프장에서 친목을 다지고, 건강을 위해 신선한 먹거리를 챙긴다.
그들의 자녀들은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까지 다녀오며,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에서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다.
손자손녀까지 똘망똘망하니, 그들에게도 걱정이라는 것이 있을까 싶다.
이쯤 되면, 인간의 걱정도 계급이 나뉘는 것만 같다.
누군가는 생존을 걱정하고,
누군가는 노후를 걱정하고,
누군가는 이 모든 걱정에서 한 발 비껴서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들에게도 말 못할 고민과 불안이 있지는 않을까?
자신의 손톱 밑 가시를 더 아프게 여기는 것은, 결국 누구나 같지 않을까?
TV에서는 몇 끼를 굶은 아이들이 생기 없는 눈으로 엄마 품에 늘어져 있다.
잔뜩 부풀어 오른 배,
손가락 서너 개 굵기만 한 팔,
힘이 없어 눈가의 파리도 쫓아내지 못하는 모습.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마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지금 이 순간,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맞을까?
뉴스를 보고 있으면, 이 세상은 한없이 불공평하게 보인다.
누군가는 호화로운 리조트에서 별 다섯 개짜리 식사를 하고,
누군가는 그날 한 끼를 해결하지 못해 쪼그려 앉아 울고 있다.
인생의 배경음악마저 다르게 흐르는 듯하다.
한쪽은 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부유한 저녁,
다른 한쪽은 비명과 고통이 섞인 거친 숨소리뿐이다.
이 극단적인 대비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속해 있는 걸까?
이런 장면을 마주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불편해진다.
내 삶이 그들과 비교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안도하는 마음과,
그렇다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만큼의 용기가 없는 나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
그 사이에서 우리는 잠깐 동정하고, 잠깐 슬퍼하다가
결국 다시 내 삶으로 돌아온다.
사업을 하다 보면,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
오랜 거래처를 잃기도 하고,
애써 개척한 새로운 거래처가 기대만 못하기도 한다.
때로는 고객의 클레임이 예고 없이 날아들고,
그 한 마디에 가슴이 뛰고, 머리가 멍해지고,
온몸이 싸늘해지는 느낌이 든다.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스트레스가 심장을 짓누른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지만, 답답함은 여전하다.
세상이 내 맘 같지 않다고,
억울하다고,
짜증이 난다고 해도,
이 현실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래서 가끔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고 싶어진다.
요즘 들어 문득 생각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외딴 시골 마을에 터를 잡고,
아침이면 해가 뜨는 걸 바라보며 일어나고,
땅을 일구어 먹거리를 직접 키우고,
가끔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책을 읽는 삶.
방해받을 일도, 신경 써야 할 일도 없이,
온전히 나만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도시는 너무 시끄럽고,
너무 많은 인간관계가 얽혀 있고,
너무 많은 책임이 나를 붙잡고 있다.
도망치고 싶은 건 단순한 나약함이 아니라,
때로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본능이 아닐까.
세상에는 온갖 시끌벅적한 소음들이 넘쳐나는데,
그 안에서 내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느낌이 들 때,
나는 나만의 조용한 공간이 간절해진다.
그러나, 나는 결국 이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해서
정말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책을 덮고, 화면을 끄고,
다시 일상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꿈을 꿔보는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버틸 힘이 생긴다.
그리고 내일도 다시,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