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 않은 자리

by 성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아이의 학부모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일정은 아내가 알아서 조율했겠지만, 이제는 내가 해야 했다. 선생님과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학부모 상담이라 하면 보통 엄마들이 가는 자리라는 편견이 내 안에도 남아 있었던 걸까.


학교 앞에 도착하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아이들의 손을 잡은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상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문 앞에서 서성이던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를 타고 등교길에 나설 때는 평범했던 풍경이었지만, 막상 상담을 받으러 오니 모든 것이 낯설게만 보였다. 긴장한 탓인지 손에 땀이 났다. 몇몇 학부모들이 나를 힐끗 쳐다보는 듯했다. 내가 유일한 아빠였을까. 괜히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OOO 아버님 맞으시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선생님이 반갑게 인사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네, 안녕하세요."


상담이 시작됐지만,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뭔가 불편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아이의 학교생활을 듣고, 학업과 친구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런 부분에 대해 내가 충분히 알고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라면 더 세세하게 질문했을 텐데. 평소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수업 시간에 얼마나 집중하는지 등에 대해 들으면서도 내가 낯선 영역에 발을 들인 것 같았다.


"아버님, 혹시 궁금하신 점 있으세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네… 딱히… 감사합니다."


상담을 마치고 교실을 나서면서도 이상한 찝찝함이 남았다. 내가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그날 오후,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미안한데 오늘 급하게 아이 준비물을 좀 사야 할 것 같아. 내가 퇴근하면 늦을 것 같은데 당신이 좀 사줄 수 있어?"

"준비물? 뭘 사야 하는데?"

"문구점 가면 다 있을 거야. 리스트 보내줄게."


전화가 끊기자 곧 문자로 목록이 왔다. 하지만 막상 문구점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매대에는 빼곡한 필기구와 학용품이 가득했고,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장난감을 보며 부모에게 조르는 모습도 보였다. 색연필도 종류가 여러 가지고, 공책도 사이즈와 두께가 달랐다.


‘이건 또 뭔가?’


아이들이 많아서인지 가게 안은 북적였고, 계산대 앞에는 줄까지 길게 늘어섰다. 다른 부모들은 익숙하게 필요한 것들을 찾아 담는데, 나는 한참을 서서 검색을 하며 우왕좌왕했다.


"필요한 거 찾으셨어요?"

점원의 질문에 나는 순간 움찔했다.


"아, 네… 잠시만요."

리스트를 다시 확인하고 겨우 준비물을 골랐다. 하지만 내가 고른 물건이 정확한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문구점을 나서는 길, 나는 가방 속에 든 작은 쇼핑봉투를 내려다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별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일도 내가 해야 하는구나’라는 현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거실은 낮처럼 조용했다. 아이들이 오기 전, 나는 혼자 늦은 점심을 챙겨 먹으며 TV를 켰다. 예전에는 이 시간에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며 회사 얘기를 나눴는데, 지금은 혼자 밥을 먹고 문구점에서 산 준비물을 챙기고 있다.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텅 빈 식탁에 앉아 있자니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이 시간에 회의 준비를 하고, 누군가와 업무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는데, 지금은 달라진 시간 속에서 혼자였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야 하는 과정 같았다.


저녁이 되자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아빠, 준비물 샀어?"

아이가 가방을 열어 확인하며 말하자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가 직접 가서 샀어. 마음에 들어?"


아이의 얼굴에 번지는 작은 미소를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자리지만,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문득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정리하며 익숙한 손길로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찾아가면서, 이 자리도 내 것이 되어가겠지. 그리고 그렇게 하루를 쌓아가다 보면, 이 역할이 내게도 자연스러운 것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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