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밝았다. 예전 같으면 출근 준비로 분주했을 시간인데, 요즘은 조용히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는 게 하루의 시작이 됐다. 익숙한 일상이 멈춘 지도 꽤 됐다. 재취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그럴수록 집 안에서의 내 역할이 점점 모호해졌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 거야?” 아내가 거실에서 가방을 챙기며 묻는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대충 머릿속으로 냉장고 속을 훑었다.
“어제 먹다 남은 반찬이 있긴 한데….”
그러다 곧 말을 고쳤다. “애들 좋아하는 걸로 해볼게.”
아내는 빙긋 웃으며 출근했다. 예전엔 내가 먼저 나가면서 “조심해서 다녀와”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문 앞에서 아내를 배웅하는 입장이 됐다. 문이 닫히고 현관이 조용해지자,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아이들 방으로 향했다. 아직 아이들은 곤히 자고 있었다. 천천히 방문을 닫고 주방으로 돌아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진 내 역할을 받아들이게 됐다. 처음에는 좀 불편했다. 회사에서의 내 모습과 너무 달랐고, 무엇보다 남들이 생각하는 ‘가장’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고, 아내가 점점 더 바빠지면서, 나는 이 자리에서 내 역할을 찾아야만 했다.
아이들이 깨어나자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침을 차려주고, 등교 준비를 돕고, 신발을 신기며 학교로 향하는 길. 예전 같으면 퇴근 후 겨우 얼굴을 맞댈 시간이었는데, 이제는 아침부터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등굣길에는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다.
“오늘도 등교 도우미 하세요?”
익숙한 엄마 한 분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뭐… 집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요.”
돌아오는 길, 나는 ‘진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삶이 이전과 완전히 다르더라도, 나름의 질서를 찾아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어제 미뤄둔 설거지를 마쳤다. 오전 내내 청소하고 정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 혼자 남은 식탁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회사 이야기를 하던 점심시간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현실 속에서도 내 몫을 해내야 했다.
오후에는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예전엔 아내가 이런 일들을 어떻게 했는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식재료들을 하나하나 고르며 고민하게 됐다. 장을 보고 돌아와 저녁 준비를 하면서 문득 깨달았다. 예전엔 실적과 성과를 고민했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저녁을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저녁이 되자 집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아이들과 아내의 하루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가정을 지탱하는 방식이 꼭 경제적인 기여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앞장서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가족과 함께하는 ‘동반자’로서 내 역할을 찾는 것. 그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아빠, 내일은 뭐 먹어?”
아이의 질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되물었다.
“뭐가 먹고 싶은데?”
아이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며 웃음이 났다. 어쩌면, 가장이란 앞에서 끌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게 내가 찾아가야 할 자리라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