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지를 체크해라
그날의 공기는 조금 서늘했고, 늦가을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다.
창밖으로 노랗게 익어가던 은행잎들 사이로 햇살이 비쳤고,
우리는 카페 창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케이크를 잘랐다.
포크질에 맥이 없었다.
내가 방금 전 꺼낸 말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 여행, 그냥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될까? 청약 준비도 해야 하고, 요즘 금리도 오르고…”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왜 항상 지금을 나중으로 미뤄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먼 마음이 느껴졌다.
마치 두 사람이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것처럼.
그건 단지 ‘여행을 가자 vs 가지 말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로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서로가 얼마나 존중하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이와 비슷한 일은 흔하다.
“밥값은 각자 내는 게 편해.”
“아냐, 사랑하는 사람이면 한 끼쯤은 자연스럽게 사줄 수 있지.”
“난 명품 가방보다 여행이 좋아.”
“난 여행보다 확실히 남는 물건이 낫던데.”
그 어떤 말도 틀리지 않다.
다만, 다를 뿐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내가 옳다’는 프레임 안에서 사랑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연애는 누가 맞고 틀린지를 따지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 두 사람이 어디에서 만나고, 어떻게 걸어갈지를 고민하는 여정이다.
그녀는 ‘경험’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었다.
오늘을 살아야 내일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 사람.
사진을 찍고, 풍경을 보고, 걷고, 그 시간 속에서 추억을 쌓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내게는 그저 하나의 여행이었지만, 그녀에겐 우리가 함께 나눈 삶의 방식이었다.
나는 ‘안정’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숫자에 민감했고, 금리를 계산했고, 지출을 고민했다.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사랑도 흔들린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금보다 나중을 더 크게 여기는 삶의 자세가 몸에 배어 있었다.
우리는 다르다.
그리고 대부분의 연애는, 이런 ‘다름’에서 출발한다.
어느 커플은 작은 카페에서의 커피 한 잔을 두고도 말다툼을 한다.
“그냥 마트에서 믹스커피 사서 집에서 마시면 되잖아.”
“근데 난 이 시간이 좋아. 이 여유가 필요하단 말이야.”
또 다른 커플은 명절 선물 하나를 두고 며칠을 냉전 상태로 지낸다.
“그 정도는 챙기는 게 예의지.”
“그건 네 생각이지. 나는 그런 형식적인 게 불편해.”
이런 갈등은 사소해 보이지만,
그 안엔 각자의 인생 철학이 녹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그 철학을 ‘이해’하기보단 ‘설득’하려고 한다.
중요한 건, 이 질문이다. “나는 이 사람의 가치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은, 나의 방식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사랑은 같은 걸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걸 좋아하면서도,
그 다름을 ‘함께 사는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연애 초반에는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다름이 드러난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한다.
하나는 상대의 가치를 존중하는 연습,
다른 하나는 내 가치가 바뀔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
그녀와의 대화를 돌아본다.
그날 나는, ‘그깟 여행’이라는 말로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
그녀는 그 한마디에 상처받았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랑은 때때로 침묵의 기술이다.
말을 아끼고, 다름을 인정하며,
내 기준을 잠시 내려놓는 순간들 속에서
관계는 비로소 자란다.
“그게 너에겐 왜 중요해?” 이 한마디가 연애의 판도를 바꾼다.
사랑은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진 두 사람이, 한 걸음 옆으로 걸어주는 일이다.
그 옆 걸음이 오래갈수록, 관계는 깊어진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세계를 배우게 된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서로를 잘라내고, 뜯어고쳐서 내 기준에 맞추는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
오히려 그 다름을 알아가는 기쁨,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유연함 속에서
사랑은 더 넓고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가끔은 다투고, 오해하고, 헛디뎌보면서 서로의 모서리를 조금씩 둥글게 만들어가는 것.
그게 연애이고, 그게 성숙이라는 이름의 사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상대방의 가치를 존중하는 그 순간, 내 존재도 존중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은 결국 거울이다.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대도 나를 비추는 방식이 달라진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
그 안에서 때로는 함께 바뀌어가는 법,
우리는 여전히 그 연습을 하는 중이다.
그 연습이 서툴러도 괜찮다.
다름을 인정하려는 그 마음이, 이미 사랑의 시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