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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해결이 아니라 감정의 동시성이다

by 성준


“그 얘기는 그냥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많은 연인들이 겪는다.


분명 사랑해서 하는 말인데, 이상하게 그 말이 상대의 마음을 더 멀어지게 만드는 순간.
어느 밤의 카페, 텅 빈 머그잔을 사이에 두고 앉아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결국 그 말을 꺼냈다.


“그 얘기는 그냥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그는 억울했다.
자신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회사에서 어떤 억울한 일을 겪었다고 말했을 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방법을 제안한 것뿐이었다.


“다음엔 그렇게 말해보는 건 어때?”
그 말이 그렇게 서운할 줄 몰랐다.
위로가 될 줄 알았던 말이, 칼날이 되어 되돌아올 줄 몰랐다.


사실 그도 알고 있다.
그녀는 해결책이 아니라, 그날 있었던 그 순간의 마음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걸.


그런데 그 마음을 알아채는 능력이 언제나 제일 먼저 생기는 건 아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을 잘 모른다.


사람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말을 듣고, 해결하려는 사람.
그리고 말하고, 공감받고 싶은 사람.


전자는 말하는 순간 머릿속에 시뮬레이션이 돌아간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방법이 필요한지,
지금 가장 빠르고 적절한 해결책은 무엇인지.
그는 자신의 사랑을 그렇게 표현한다.
도와주고 싶어서, 해결하고 싶어서.


반면 후자는 그런 해결책이 부담이다.
위로는 방향이 아니라, 온도라고 믿는다.
함께 화내주고, 함께 아파하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는 것이 더 큰 사랑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이 둘이 만나면,
서로의 ‘사랑하는 방식’이 충돌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넌 항상 뭔가를 고치려 들어.”


그는 속으로 되묻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위로가 되는 건데?”

연애는 이처럼 다른 리듬을 가진 사람 둘이,


서로의 리듬을 맞춰가는 일이다.


사랑은 언제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그 사람이 어떤 방식의 위로를 원하는지를 묻는 마음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꽤 많은 훈련과 실수를 필요로 한다.

어쩌면 연애는 대화를 통해 서로를 배워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내가 듣고 싶은 방식이 아니라,

상대가 위로받고 싶은 방식으로 들어주는 것.


나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진심을 전하는 언어가 서로 달랐을 뿐이다.


문제를 해결되지 않아도, 사랑은 가능하다.

그래서 이제는 묻는다.


“지금은 들어줄까, 아니면 같이 방법을 찾아볼까?”

그 단순한 질문 하나가,
때론 길어진 싸움보다 더 큰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걸,


지금은 안다.

사랑은 정확히 말하는 일보다,
같은 온도로 들어주는 감각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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