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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ul 09. 2020

인생 표류기에 담긴 희망과 초월성에 관한 이야기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후기 (2012)

이렇게 말하는 게 다소 어색하지만 영화 <Life of Pi>는 기본적으로 해양조난영화이다. 인도를 출발해 캐나다로 향하던 청년 파이는, 지구 상에서 가장 깊다는 마리아나 해구가 있는 필리핀 부근에서 조난을 당해 부모와 형을 잃고 홀로 살아남는다. 그리고 파이는 구명보트에서 벵골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공존하며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 해안까지 표류하게 된다. 이 표류기를 어른이 된 파이가 캐나다인 작가에게 들려주는 것이 영화의 골격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동의할 것이다. 영화 <Life of Pi>는 몇 가지 관점만으로는 도저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마치 이승을 떠난 듯, 변화무쌍하게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의 향연과 일찍이 본 적 없는 화려하고 환상적인 이미지의 향연 속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한바탕 긴 꿈에서 깨어난 듯 이승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도 지금 그 긴 꿈에서 깨어나 이승으로 돌아온 후, 생각나는 몇 가지 꿈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먼저 매우 실용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해양조난영화 <Life of Pi>에는 조난당한 파이가 표류하는 동안 준수한 ‘해양 조난자 생존 매뉴얼’이 나온다. 그리고 파이의 표류기를 잘 관찰해보면, 그는 상당히 철저하게 그 생존 매뉴얼대로 생활하였고 마침내 멕시코 해안에 도착해 구조된다. 그러므로 ‘알아두면 상당히 쓸모 있을 수도 있는’ 파이의 생존 매뉴얼을 한번 살펴보자.


1. 머물고 있는 곳을 정돈하고 생존을 위한 전투를 견뎌라

(Set your house in order and dig in for the battle to survive)

2. 먹고 망보고 휴식하는 엄격한 일정을 세워라

(Establish a strict schedule for eating, keeping watch and getting rest)

3. 오줌이나 바닷물을 마시지 말 것

(Do not drink urine or sea water)

4. 계속 바쁘게 지내되, 불필요한 노력은 피하라

(Keep busy, but avoid unnecessary exertion)

5. 카드, 스무고개, 스파이 게임 등이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The mind can be kept occupied by playing card games, Twenty Questions, or I Spy)

6. 떼창은 정신 고양의 확실한 방법이다

(Community singing is another surefire way to lift the spirits)

7. 이야기를 하는 것이 특히 좋다

(Telling stories is highly recommended)

8. 무엇보다 희망을 잃지 마라

(Above all, don't lose hope)


크게 보면 세 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최소한의 생활규칙을 정립하라는 것으로 1~3번 항목이 여기에 해당된다. 가용한 자원을 챙겨보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과 반드시 회피해야 하는 것을 엄격히 준수하라는 것이다. 주변 정리정돈과 엄격한 휴식권 보장이 눈에 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의 면모이다.


두 번째는 4~7번 항목인데 모두 조난당한 생존자의 심리상태 관리에 대한 지침이다. 느슨하게 지내지 말 것을 권고하면서도 ‘불필요한 노력 회피’라는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정신승리 같은 것에 현혹되지 말라는 지침이다. 또한 가벼운 여가활동을 통해 살짝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Community singing 즉 함께 노래 부르는 떼창과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거나 해소하는 것이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권고하고 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여유를 가지면서 현실에 고착되지 말라는 것이다.


두 가지 범주 모두 평상시 생활에도 매우 유용한 지침들이다. 그리고 조금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소박하고 단순한 몇 가지 것들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 괜찮은 상태의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세 번째 범주가 중요하다. 마지막 8번 항목, 희망이다. ‘무엇보다 희망을 잃지 마라’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가족을 모두 잃고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구명보트에 홀로 남겨진 파이는, ‘벵골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상징하는 그 무엇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투쟁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파이는 많은 일을 겪게 되고 라차드 파커와의 관계도 조금씩 정립해 나가면서, 좁은 차양이 주는 한 조각 작은 그늘에서도 큰 행복을 느낀다. 대양에서 흔히 일어나는 폭풍 속에서 파이는 신을 향해 “모든 것을 잃은 저에게 무엇을 더 원하느냐”라고 절규하며 쓰러지기도 하지만 ‘낮에는 풍요롭고 밤에는 위험한’ 떠다니는 섬(floating island)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희망을 되찾는다. 파이는 그 섬을 떠나며 “내가 삶의 희망을 벗어났을 때 신은 내게 휴식을 주었고 여정을 계속하라는 표징을 보여 주었다” (And when I was beyond all hope of saving, He gave me rest, then gave me a sign to continue my journey)라는 고백을 남긴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The Letter to the Romans)에 이런 글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Not only that, but we even boast of our affliction, knowing that affliction produces endurance, and endurance, proven character, and proven character, hope, and hope does not disappoint)


그렇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다소 관념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그런데 왜 주인공 이름이 파이(Pi)일까? 파이의 본명은 Piscine Molitor Patel이다. 영화 도입부에는 소년 파이가 Piscine이라는 이름 때문에 겪게 되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나오는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 영화는 주인공 이름을 원주율(π) 즉 Pi로 지었을까? 나는 이것이 궁금했다.


파이(π=3.14159)는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 즉 무리수이다. 소수점 아래 자릿수가 불규칙하게 무한하다. 또한 파이는 초월수(transcendental number)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식과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있는 수(數)는 대수적 수(數)이다. 즉 인간은 자연수의 뺄셈을 통해 음수를 발견했고, 나눗셈을 통해 유리수를 발견했으며, 제곱근을 통해 무리수를 발견했다. 그리고 -1의 제곱근으로 허수(i)를 발견했다.


반면 초월수는 이렇게 대수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초월수의 수학적 정의는 ‘대수 방정식의 해가 아닌 수(數)’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인식과 경험의 범위를 벗어난 수(數)가 초월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한두어개 발견된 초월수에 대해 수학자 칸토어가 ‘수(數)의 대부분은 초월수’라는 엄청난 수학적 증명을 하게 된다. 즉 인간이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 있는 수(數)에 대한 지식은 매우 협소하며 대부분의 수(數)는 실은 미지의 범주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어른이 된 파이가 캐나다인 작가에게 벵골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함께 한 자신의 태평양 표류기를 거의 다 들려준 후 이런 이야기를 한다. 멕시코 해변에서 구조된 후 사고보고서 작성을 위해 자신을 찾아온 보험사 직원이 자신의 표류기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벵골호랑이, 떠다니는 섬 등을 회사 공식 보고서에 기재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이며 상사의 강한 질책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파이는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다고 한다. 구명보트에 있었던 호랑이, 하이에나, 오랑우탄, 부상당한 얼룩말이 사실은 자신과 악당인 주방 요리사, 파이의 엄마, 착한 불교신자 선원을 상징하며 그 구명보트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는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파이는 작가에게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본다. 작가가 호랑이와 함께한 이야기가 더 좋은 이야기라고 답하자 파이는 고맙다며 그것은 신과 함께 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초월적인 존재인 신과 함께 한 이야기가 더욱 좋다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N차 관람한 후 주인공의 이름 Pi에 대해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주인공 이름 파이(π=3.14159)를 통해, 세계는 혹은 삶은 인간의 인식과 경험의 범위를 벗어난 초월성으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다고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초월성으로 세계와 삶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좋은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실재에 더욱 가깝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사람에게 스토리를 상세하게 미리 설명해줘도 영화 관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야기를 미리 듣고 관람하는 것이 오히려 영화를 감상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N차 관람을 하면 할수록 깊어지는 영화다. 왜냐하면 파이(π)의 인생은 순환하지 않은 무한소수 즉 무리수와 같이, ‘반복되지 않고 무한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왜 반복되지 않고 무한하게 전개되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영화 도입부에서 어른이 된 파이가 작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비슈누, 최고 영혼, 만물의 근원. 비슈누는 해변이 없는 우주 대양에 떠다니며 잠을 자고 우리는 그의 꿈의 산물이다.”


“Vishnu, the supreme Soul, the source of all things. Vishnu sleeps, floating on the shoreless cosmic ocean and we are the stuff of his drea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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