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잠시 멈춤
암환자를 살리는 심리상담 이야기
by 미술심리상담사 여정 Feb 17. 2024
그렇게 매일 방사선을 받으러 병원에 갔다. 매일 아침 출근하다시피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일이 일상의 루틴이었다. 아무 곳에도 일하러 가지 않는 삶. 오전에 병원 다녀오면 오후에 아무 할 일도 없는 일상. 처음에는 참 낯설었다. 매일 돌아오던 똑같은 하루, 똑같은 한 주일이 사르르 사라져 버린 대단히 낯선 삶을 마주했다.
어느 날부터 병원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에 오기 시작했다. 나는 지하철 보다 버스를 좋아한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의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 지하철을 훨씬 많이 탄다. 정확한 도착이 필요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고서 비로소 도착시간을 보장할 수 없는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따사로운 봄빛이 가득한 거리는 얼마나 다채로운지. 새로운 간판이 들어서는 거리가 얼마나 재미있는 것들로 가득한지. 나는 멍하니 버스 창밖을 보며 참으로 오랜만에 새록새록한 감정을 느껴보았다.
어느 날은 제법 걸었다. 햇볕을 받으며 걷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시장이 나오면 내려서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혼자서 밥도 먹어 보았다. 시장가 꽃집에서 봄 냄새 물씬 나는 작은 화분과 다육이들을 구경하고 몇 개 사기도 했다.
‘이래도 괜찮을까’라는 마음이랑 ‘이래도 괜찮겠지’하는 마음이 늘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상담사는 내 인생에 잠시 멈추고 브레이크를 건 것에 대해 괜찮다고 해 주셨다. “제가 죽으면 무슨 소용 있겠어요. 크루즈 여행도 가고 싶고 나를 위해 살 거예요. 언젠가는 섬에서도 자연인처럼 살고 싶어요.” 이런 내 말에 상담사는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나는 겨우 초기 암 환자이면서 때론 비장하게, 때론 아무 말 대잔치처럼 상담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저는 제 삶이 그다지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상담사님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의지를 하던 상담사님이 언젠가는 안 계실 거라는 걸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사실 연세를 생각해 보면 그러하기도 하다. 고령이신 데다 눈도 나빠지셔서 시력도 얼마 남지 않으셨고 몇 년 전 큰 사고를 당하셔서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다고 했다. 본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담담히 자신의 여명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는 모습만큼 강렬한 가르침이 있을까. 지금의 내 삶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고. 그리고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리고 소유보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예전에 회사 다닐 때 받던 만큼은 벌어야지’이런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오전 파트타임, 오후 파트타임, 주말 일까지 꽉꽉 스케줄 표를 채웠던 것이다. 그 결과 월급만큼, 때론 월급보다 많은 소득을 기록할 때가 있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암진단을 받자 죽고 나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암 정도는 걸려야 일을 놓게 되다니 참 지독한 집착이었다 싶다.
그래서 방사선 치료가 끝나갈 때쯤 다시 요양병원에 가기로 했다. 돌봄과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다른 것 생각하지 않고 내 몸만 생각하고 나를 위해 결정했다. 마지막 며칠을 방사선 치료받는 대학병원 근처에 있는 한방병원에서 보내고 드디어 나는 퇴원했다. 벚꽃이 참으로 화사한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