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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집에서 살아간다는 건

오늘을 훔쳐가는 행복도둑을 잡아라

드디어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다. 4주에 걸친 대장정이다. 이십 년이 넘은 구축 아파트는 바닥이며 천정이며 화장실, 주방이 모두 철거될 것이고 창호까지 싹 다 교체하게 된다. 묵은 살림을 한번 싹 뒤집어엎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지만 한 번쯤은 오래된 살림에 필요한 일인 듯하다. 베란다 창고며 각종 수납장 안의 정체불명의 짐들은 어찌나 많은지, 그곳에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무수한 물건들을 이고 지고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워 버리고 또 버리고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겨우 이사 준비를 마쳤다. 


집을 정리하다가 문틀 옆의 벽지에 눈길이 갔다. 해마다 아이들의 키를 재어서 벽에 기록해 둔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보았더니 처음 기록이 131센티이다. 초등학교 3~4학년 때였던 거 같다. 그 뒤로 쭉쭉 자라서 167까지 기록이 되어 있다. 해마다 한 번쯤은 연례행사로 키를 재었는데 "키재자"하면 두꺼운 책을 들고 쪼르르 키 재는 자리로 오곤 했다. 머리 위에 직각으로 책을 얹고 연필로 표시를 하면서 "컸어? 컸어?" 하던 그 설렘. 조금이라도 더 컸으면 하고 기대감 가득히 키를 재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어떤 해, 방학이 끝날 무렵 아이는 "엄마, 나 키가 좀 큰 거 같아요. 한번 재줘요."라고 한 적도 있다. 어떤 때는 생각보다 많이 컸다고 좋아라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제자리걸음에 실망하기도 하고 줄자를 똑바로 쟀냐고 의심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깔깔 웃던 그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 세월이 벌써 10년이 되었다. 초등학생 때 이사를 왔던 그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이제 모두 대학생이 되었다. 처음 이사를 왔던 여름, 런닝을 입고 거실을 신나게 돌아다니던 귀엽고  통통한 아들의 모습이 선한데 이제는 훌쩍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고 벌써 독립을 하고 자취를 한다니  이 집에서 아이들을 다 키워냈구나 하는 사실이 실감이 된다. 아이들은 자라고 우리 부부는 늙었다. 


"그거 다 버려주세요"

베란다 창고 한 칸에 오래된 나무액자가 한가득이다. 결혼사진이며 돌사진 등 한때는 소중했으나 이제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야 할 순간들이다. 

"어머나, 그런데 이게 누구예요? 진짜 예쁘네요."

안 예쁜 신부가 어디 있으랴마는 결혼사진 속의 남녀는 드레스, 메이크업, 포토샵이 합쳐진 데다 젊음까지 더해져 내가 봐도 예쁘다. 

"세월의 풍파를 많이 맞았지요?"

사진 속 모습과 너무 다른 지금이라 부끄럽고 머쓱한 마음이다. 나도, 남편도 세월의 직격탄을 맞은 것처럼 엄청나게 늙고 변했다.  젊은 남녀가 만나서 부부가 되고 아이들을 낳고 집을 장만하고 그 집에서 아이들을 키워서 장성한 성인으로 독립시키는 그 세월의 흔적은 집이라는 공간에 고스란히 남아서 숨 쉬고 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래는 이사를 갈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부동산 경기 불황과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이 집을 대대적으로 고쳐보기로 맘먹었다. 집이란 건 생각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이번 공사를 하면서 느끼게 된다. 

"우리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고기파티 한번 해야지."

남편의 제안에 아니 뭐 집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고쳐서 다시 돌아올 거지 않냐고 하니 그래도 옛집과는 마지막 이별을 해야 한다나. 결국 우리는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이 집에서의 마지막 저녁만찬을 마쳤다. 이제 한 달 뒤, 우리는 또 입주파티를 하겠지. 그렇게 시간과 기억은 집이라는 공간과 함께 존재하면서 쌓여간다. 우리가 함께한다는 것은 그런 추억이자 세월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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