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의 제안 때문에 지쳐 있던 라훌은 자리를 정리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저녁에는 나시르가 방문하기로 이미 약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시르와 라훌은 가장 이야기하기 편하면서 가장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대다. 둘은 겉모습만 다를 뿐 같은 속살을 가지고 있다. 양의 탈을 쓴 늑대인지, 늑대의 탈을 쓴 양인지 둘은 서로 헷갈려했다.
"어서 오십시오 나시르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훌 님"
둘은 식탁에 앉아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시작했다.
나시르의 접시엔 정성스럽게 모은 풀이, 라훌의 접시엔 뭔지 모를 - 하지만, 양은 아닌 고기가 놓여 있었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라훌 님이 직접 요리 준비까지 하십니까?"
"스스로 먹을 것을 챙기지 못하는 늑대는 이미 늑대가 아닙니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양, 생존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늑대.
둘은 말없이 이야기를 하며, 언덕의 풍경에 대해 숲의 어두움에 대해 이야기를 끌어갔다. 어느덧 식사가 끝나갔다. 양의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를 누가 먼저 꺼낼까?
"와인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실례를 무릅쓸 만큼 맛이 좋군요. 기꺼이 부탁드립니다"
둘은 이야기의 시작을 한 턴 미룬다.
그리고 이번엔 양들이 좋아하는 풀과 늑대들이 좋아하는 냄새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갔다. 두 번째 잔도 비워져 가고 있다.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까?
"와인 색이 참 진하군요. 마치 생명을 머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도와 흙의 생명이 들어 있으니까요"
"포도주는 항상 직접 만드십니까?"
"땅에 떨어진 포도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항상 갓 따서 곱게 다지고 충분히 발효시키지요. 아무리 번거로워도 직접 합니다. "
와인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는다.
이제 잔이 다 비워져 간다. 그런데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까?
"라훌 님의 와인에 대한 마음가짐은 존경스러울 정도입니다. 혹시, 다른 늑대들도 그런가요?"
"생명을 먹고살아야 하는 늑대라면요"
잔이 비워졌고, 둘은 헤어졌다.
'양의 죽음과 늑대는 관련이 없는 것 같군. 그럼 사고인가? 아니면, 사고를 위장한? 혹시 개들이?'
나시르는 유력한 용의자 집단 중 하나인 늑대를 지웠다.
'양들도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모르는군. 그럼 사고인가? 아니면, 사고를 위장한? 혹시 철없는 늑대들이?'
라훌의 머리도 빠르게 실마리를 찾고 있다.
나시르와 라훌은 언제 양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