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장도(銀粧刀)는 조선시대 남녀가 몸에 지니고 다니던 장식용 칼이다.
흔히 장도라도 한다.
유학적 교훈을 보급하기 위해 만든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임진왜란 당시 작은 장도(粧刀)를 가지고 있다가 유사시 자결 또는 공격용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같은 전시 상황에서 일부 백성들이 휴대용 칼을 가지고 다녔다는 것은 개연성이 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은장도를 패용하고 다녔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많은 기록과 유물이 이를 증명한다.
일본 사무라이들도 칼을 차고 다녔지만, 엄연히 관료였다.
군인이나 관료가 아닌 민간인이 평소에 칼을 가지고 다니는 일은 역사적으로 흔하지 않다.
권력의 통제가 없는 무정부 상태이거나 언제 어디서 공격과 약탈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어야 한다.
조선은 호신용 칼을 가지고 다닐 만큼 무정부 상태의 혼란스러운 나라였다는 말인가?
[여러 모양의 장도(粧刀) 유물이다. 장도는 장식한 칼이라는 뜻이다. 나무나 칠보로 장식한 칼도 있지만 은으로 장식한 칼이 많았기 때문에 은장도로 총칭하게 되었다.]
가장 안전한 나라, 조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 태종은 흔히 '왕자의 난'으로 유명하다.
젊은 나이에 문과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방원은 여러 차례의 내전을 통해 건국 공신을 몰아내고 정상적인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
당시 내전이 가능했던 것은 고려시대의 전통인 사병(私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순의군(順義軍), 천덕군(天德軍) 따위로 불렸던 사병은 지방 호족들의 개인 군사조직이다.
이방원은 내전을 통해 지방 호족을 비롯한 공신들을 척살하고 사병을 혁파했다.
이후 사병들은 국가군사조직에 편제되었다.
대부분은 군인들은 국경 외곽에 배치되었고 한양에는 궁궐을 경비하는 최소한의 병력만 유지했다.
조선은 중앙 관료제 사회였다.
각 지방 고을까지 관료가 파견되었다. 군대도 모두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정부의 권한이 미치지 못한 곳은 없었다.
만약 정부의 눈을 피해 군사조직을 만들고 운영하면 무자비한 역모죄로 다스렸다.
중국은 수많은 민족과 넓은 땅 때문에 중앙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었고, 이 틈을 조폭이 메웠다.
이른바 '무림'이라고 부르는 영역이다.
영화에서 미화하여 멋있고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지만 그냥 사설 무기로 백성들을 위협하고 삥을 뜯는 양아치 조직에 불과하다.
이후 나라가 불안해질 때마다 나타나는 군벌세력은 무림의 양아치를 끌어다 모은 사병조직이다.
이런 전통은 현대에서 '흑사회'와 같은 조폭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봉건국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로를 죽이는 전국시대였다.
통일 이후에도 봉건 전통이 남아 중간 관료인 사무라이들이 칼을 두 개나 차고 다녔다. 사무라이를 하다가 도태한 떨거지들이 모여 칼을 휘두르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흔히 '야쿠자'라고 불리는 일본 조폭이다.
조선 초기, 북방 지역에서 귀화한 사람들 중에는 산적(山賊)이 되어 백성들을 약탈한 경우가 있었다.
이들이 산적이 된 것은 정부에서 농사 지을 땅을 주지 않아서 먹고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이들에게 가축을 도축할 수 있는 역할을 주어 생계를 유지하게 했다. 흔히 백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후 산적은 없어졌다.
조선시대에 해적(海賊)이 있었다는 기록이나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당시 노략질을 했던 해적은 왜구뿐이었다.
조선 후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던 '사당패'들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던 백성들에게는 인기가 높았지만, 함부로 마을에 들어가서 공연을 할 수 없었다.
'풍기문란'을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실제 사당패는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매춘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동네 청년들과 싸우거나 매를 맞을 수 있는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는 자기 보호를 위해 칼을 숨기고 다니기도 했을 것이다.
이후 사당패가 사회적 문제가 되자 남자들로 이루어진 '남사당패'가 조직되었다.
이들도 칼을 숨기거나 춤처럼 보이는 '택견'같은 싸움 기술을 익혔다.
하지만 남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최소한의 자기 방어용이었다.
[포졸들은 평상시 칼이나 창이 아니라 육모방망이를 가지고 다녔다. 병장기는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에도 조폭이 있다고 말하면서 '왈짜패'를 예로 든다.
왈짜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중인으로 하급관료이다.
이들은 관료의 신분을 이용하여 공식적인 연행이나 술자리에 기생을 동원하고 술과 음식을 공급하는 부분에서 이권을 챙기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엄연히 관료였고, 부정한 일이 발각되면 탄핵, 문책당하기에 독자적인 조직으로 발전한 사례는 없다.
[평양감사가 부임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관원이 행렬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칼이나 창이 아닌 회초리로 쫓아내고 있다.]
조선은 가장 안전한 나라였다.
전쟁상황이 아닌 평소에는 포졸도 칼이나 창이 아닌 육모방망이를 들고 다녔다.
군사무기인 병장기는 국가기관에서 제작했으며, 사설 대장간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었다.
식도(食刀) 하나를 만들어도 관청에 신고해야 할 정도로 엄격하게 통제했다.
우리나라에는 조폭의 전통은 없었다.
일제강점기 김두환 조폭 세력은 모두 일본 야쿠자를 흉내 낸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매우 안전한 곳이다.
민간인이 총기나 도검류를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며 강한 처벌을 받는다.
사냥용, 호신용 총, 수련용 도검도 경찰서에 신고하여야 하며 평소에는 경찰서에 보관해야 한다.
만약 조폭이 총기를 소지하거나 발포하여 인명사고가 생기면, 여론이 들끓고 경찰과 검찰에 의해 해당 조직과 방계조직의 뿌리까지 탈탈 털리고 멸문지화를 당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마마’라고 불리던 전염병과 호랑이에게 공격을 당하는 호환(虎患)이었다.
조선의 주력 무기
[조선시대 무과시험은 말타기, 활쏘기 따위가 기본이었다. 칼에 관한 시험은 없었다.]
조선에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대포와 최종병기 활, 분대 전투의 꽃인 진법과 창이 있었다.
일본군의 주력 무기가 칼이라면 조선의 주력 무기는 대포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사거리가 길고 위력적인 대포로 일본군을 격파했다.
당시 일본군은 최신식 조총을 사용했는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부산포의 장군은 이렇게 기록하여 보고했다.
[조선의 주력 무기는 대포와 활, 창이었다. 칼은 지휘용, 장식용이었다.]
"일본군의 조총은 소리가 요란하여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실제 위력은 없습니다. 능히 우리의 활로 제압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활쏘기는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무과시험을 보는 사람들에게 활쏘기는 필수였다. 실제 조선 무관이나 병사의 활쏘기 실력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기록한다.
선비들은 평소에도 활쏘기 연습을 했다.
전국에서 크고 작은 활쏘기 대회가 열렸고 친목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단원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활과 관련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활쏘기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좌-혜원 신윤복/계변가화/종이에 채색/28.2*35.6cm/19세기 초/국보 135호/혜원 전신첩/간송미술관 소장.
선비가 활쏘기 연습을 하다가 냇가의 감은 여인들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우-단원 김홍도/활쏘기-단원 풍속화첩/종이에 담채/27*22.7cm/18세기/국립중앙박물관.
관청의 무인이 활쏘기를 지도하는 장면이다.]
칼에는 관심이 없었다.
칼의 길이도 짧아 전투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나마 칼이 길어지고 검법이 발전한 것은 임진왜란과 일본 칼의 영향 때문이다.
무과시험에는 아예 칼에 관한 시험과목조차 없었다.
칼은 지휘용이나 권위를 드러내는 장식용이었다.
칼과 관련한 문화에는 사인검(四寅劍)이 있다.
사인검은 특별한 날을 잡아 만든 장식용 검이다. 주로 왕의 권위를 드러내거나 장군에게 지휘용으로 하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은장도는 장식용 칼이다.
전 세계 문화에서 칼에 화려한 장식을 하는 것은 대부분 의장용이나 장식용이지 전투용이 아니다.
무기 디자인의 핵심은 간결이다. 복잡해지면 무기의 효능이 떨어진다.
평소에 장식용이었다가 전투용으로 바뀌는 그런 병장기는 없다.
이는 생사가 걸린 전투를 우습게 보는 인식의 오류이다.
조선은 민간인이 크기와 관계없이 칼을 휴대하고 다니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민가에서 은장도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살상용이 아니라 장식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날을 벼르지 않았고 칼끝도 무뎠다.
지금까지 은장도로 살상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범죄가 일어날 수는 있다. 설령 은장도를 사용했다라도 살인도구는 그냥 칼일 뿐이다.
돌로 사람을 때려죽였다고 돌을 살상용 무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의 오류이다.
동시에 은장도로 고기를 썰고, 과일을 다듬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어부는 어부의 칼이 있고, 주방에는 식도가 있고, 푸줏간에는 백정의 칼이 따로 있다.
식도이면서 백정의 칼, 어부의 칼인 경우는 없다.
무엇보다 은장도는 병장기가 아니기 때문에 관청에서 만들지 않았다.
대부분 사설 대장간에서 만들고 공예품 업자들이 시장에 내다 팔았다.
더 많이 팔기 위해 은장도는 더욱 화려해지고 다양해졌다.
은장도는 양심의 상징이다.
은장도의 뿌리는 왕실 의례용 장식도이다.
금장도, 은장도는 조선 시대 의식(儀式)에 사용한 기구이다.
나무로 만들었으며 칼집의 조각에는 금은으로 칠하고 그 틈새에 붉은색이나 녹색으로 채색하였다.
왕이나 왕비, 세자의 행차 때 행렬 좌우에 각각 2개씩 들고 행진하는 데 사용했다.
[왕실 의례용 금장도. 나무를 깎아 만들고 채색을 했다. 일부분 금칠을 했다. 날카로운 강철로 만들지 않고 사람을 해치지 못하는 나무로 만든 것은 의미심장하다.]
칼은 강력한 힘과 권위를 뜻한다.
왕실에서 금장도, 은장도를 만들어 의장용으로 사용한 것은 칼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상징성 때문이다.
사대부들은 왕실의 의장용 금장도, 은장도를 수용해 장식용 칼로 만들어 패용하고 다녔다.
사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이고 이를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의지와 힘이 필요했다. 이러한 의지를 칼에 투영한 것이다.
그러니까 은장도는 선비의 양심을 지키는 상징인 것이다.
금장도가 아니라 은장도로 만든 것은 금을 사용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금은 사치와 허영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청렴에 위배된다고 여겼다.
조선시대에 금은 공식적으로 채굴되지 않았다. 특별한 경우에만 아주 조금씩 사용했다.
은장도가 여성들이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애초에 여성용으로 시작했다는 오해가 생겼다.
하지만 은장도는 원래 남성용이었다.
그것도 지식인이었던 선비나 관료들이 주요 소비층이었다.
이런 남성들의 문화를 알 수 있었던 여성들은 관기나 사설 기생뿐이었다.
기생들은 남성들이 좋아하던 개념인 명월, 춘향, 매창 따위를 기명으로 사용하면서 관심을 끌었다.
기생들이 남성의 문화인 은장도를 수용해 장식용으로 패용하고 다닌 것은, 그것이 당대의 고급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생의 첨단 유행을 사대부집 부녀자들 따라 했다.
여성의 은장도가 정조, 순결, 사랑 따위의 상징이 된 것은, 원래 은장도가 선비의 양심,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는 여성이 지조와 절개를 지킬 이유는 없었고, 대신 현실적인 사랑이나 정조를 지키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미인도/작자미상/비단에 담채/129.5 ×52.2cm/20세기/동아대 박물관.
짧은 저고리 앞섶에 은장도를 차고 있는 기생의 모습이다.
당시 일본의 침탈과 영향이 커졌고 기생은 일본 남성들의 관심사였다.
앞가슴을 노출하거나 팔을 들거나 치마를 올리는 자세는 성적인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 왜곡한 것이다.]
이후 은장도는 남성과 여성이 공유하는 문화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이 망하면서 선비들도, 지조와 절개도 함께 사라졌다.
총과 칼로 무장한 조선인은 오직 독립투사뿐이었고, 일본은 조선인이 사소한 은장도라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쓸모없어진 은장도는 고작 과일을 깎는 도구로 전락했다.
선비들이 사라지면서 남성의 은장도 문화도 없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도 기생문화는 없어지지 않았다.
이들 사설 기생들은 일본인과 친일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사무라이 문화인 칼의 패용과 할복 문화가 기생의 은장도 문화에 스며들었다.
[은장도로 자결을 한다는 설정은 오류이다. 이건 일제강점기 사무라이들이 칼로 할복하는 문화에 오염된 것이다.]
여성에게 순결을 강요하기 위해 자결용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헛소리이다.
이런 헛소리를 근거로 조선시대 여성차별 운운하는 것도 어이없다.
조선에서는 남편 사별 이후에 재혼을 하지 않고 자녀와 시부모를 잘 모신 여성에게 '열녀문'을 지어주고 치하했다.
반대로 추정하면, 남편이 죽으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재혼을 했고, 시부모와 자식을 버리고 본가로 갔다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나라에서 큰돈을 들여 모범을 만들려고 했을까?
더 큰 반전은 열녀문이 아주 귀하다는 것이다.
칼은 살상용 무기이다.
이런 칼에는 전쟁, 살육, 장군, 패권, 투쟁 따위의 상징이 붙어있다.
칼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칼이 아닌 은장도.
양심을 지키고 내면의 힘을 기르기 위한 세상에서 가장 인문학적인 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