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라에서 매일 잡는 소를 계산하면 1,000마리이다. 나라의 제향 때나 호상(犒賞-군사들에게 상으로 내리는 음식) 때에 잡는 것, 또는 반촌(성균관 근처)과 서울 5부 안 스물네 개소의 푸줏간에서 잡는 것, 게다가 전국 300여 고을마다 관에서 반드시 푸줏간을 열게 한다.
작은 고을에서는 날마다 소를 잡지는 않으나 큰 고을에서 겹쳐 잡는 것으로 상쇄된다.
또한 서울과 지방에서는 혼례, 잔치, 장례, 향사(지방의 활쏘기 대회)와 개인이 도살해 법을 어기는 개략적인 수도 이미 이와 같다.(정약용/목민심서)
나라에서 잡는 소 500마리와 민가에서 잡는 소 500마리를 합하면 전국에서 매일 도살되는 소는 1000여 마리에 이른다. 18세기 후반에 이미 연간 도살되는 수가 38만 마리에서 39만 마리에 이른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에 적어도 120만 마리의 소를 사육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김동진)
[성협/풍속화첩 중 야연/종이에 담채/28.3 × 29.7cm/19세기/국립중앙박물관.
성협은 신윤복의 친척이라는 주장도 있다. 야외에서 소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그렸다. 조선 후기 소고기 소비량은 1990년대 초 1인당 소비량과 비슷했다.]
조선 중기까지 몇몇 선비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소 그림이 전한다.
[(왼쪽) 김시/황우/종이에 담채/14.5×26.3㎝/조선중기/서울대박물관.
(오른쪽)김식/어미 소와 송아지/종이에 담채/90.3×51.8㎝/국립중앙박물관.
김식은 김시의 손자이다. 할아버지 그림을 일부 참조하여 정감 있는 소 가족을 그렸다.]
위 그림 속의 소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물소이다.
그럼에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물소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작품 속의 물소가 중국 그림을 모방한 것인지 실제 보고 그린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연구에 의하면, 조선 황소는 물소와의 교배종이라고 한다.
한반도에 서식했던 소는 작고 힘이 없어서 농사용으로 활용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 남부나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가축 물소를 수입하고 교배를 시켜 크고 힘센 소를 만들어낸 것이다.
만약 직접 보고 그렸다면 교배종의 중간 형태가 아닐까 추정한다.
1948년 국정 음악 교과서 1학년용에 수록된 ‘얼룩 송아지’라는 노래가 있다.
박목월 작사, 손대업 작곡의 동요이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두귀가 얼룩귀 귀가 닮았네’
그런데 이 얼룩 송아지가 외국에서 수입한 젖소라며 문제 삼은 적이 있었다.
우리 전통문화에는 얼룩 송아지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룩소는 우리 전통 소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헤프닝 이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 소와 관련한 문화가 끊겼기 때문이다.
[(위) 김홍도/논갈이/종이에 수묵/27.8*23.8/국립중앙박물관.
(아래) 김덕하(金德夏,1722-1772)/목동오수(牧童午睡)/종이에 담채/31×56㎝/평양 조선미술관.
김홍도의 풍속화에 나오는 소는 일소(역우,役牛)이다. 지금의 한우와 가장 닮은 모습이다.]
김홍도의 풍속화에 나오는 소는 독자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농사일을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이다.
안타깝게도 김홍도나 신윤복 같은 탁월한 능력의 화가가 그린 소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목동오수’는 소에게 풀을 먹이러 나온 아이가 낮잠 자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도 소는 주인공이 아니다. 이 작품은 삶의 여유나 풍류를 표현한 것이다. 중국에는 이와 비슷한 그림이 많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1000여 마리의 소를 잡아먹었다고 기록했다.
소는 말이나 돼지보다 흔한 가축이었다.
하지만 소를 소재로 하는 독자적인 그림은 거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에 붙은 상징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양심이나 군자, 풍류와 같은 인문학적 상징이 붙어있지 않다.
조선 시대에 말은 그저 운송수단에 불과했고, 소는 농사일에 필요한 가축일 뿐이었다.
소가죽으로 만든 신발
하루에 1000마리 이상의 소를 잡아먹었다. 그렇다고 남은 가죽을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많은 소가죽은 어디에 사용했을까?
가죽으로 만든 옷은 별 인기가 없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옷은 풀을 먹이고 방망이질을 한 광목옷이나 비단옷이었기 때문이다.
가죽으로 가방이나 지갑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겠으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 고작 안경집, 나무에 가죽을 씌운 필통 정도가 있을 뿐이다.
소가죽은 군인들의 갑옷을 만드는데 가장 많이 사용했다.
[명량]이란 영화에도 나오지만, 장교뿐만 아니라 일반 사병도 모두 갑옷을 입었기에 그 수요가 일정했으며 양도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갑옷뿐만 아니라 활을 보관하는 궁대(弓袋), 동개(筒介), 군화 따위도 모두 소가죽으로 만들었다.
일상생활에서 가죽이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곳은 역시 신발이다.
신발을 천이나 나무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갑옷을 만들고 남은 소가죽의 대부분 가죽신을 만드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유물 중에는 사슴 가죽으로 만든 신발도 있는데 조선 후기에는 사슴이 거의 멸종해서 특별한 경우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화장(靴匠, 신의 목이 있는 화(靴)를 제작)과 혜장(鞋匠, 신의 목이 없는 혜(鞋)를 제작)으로 활동하였던 사람들을 주피장이라고도 하며, 우리말로는 '갖바치'라고 했다.
갖바치는 가죽 안에 비단을 받친 데서 생겨난 말로 귀한 여자들의 비단신인 운혜(雲鞋), 온혜(溫鞋), 당혜(唐鞋), 남자들의 목화(木靴), 태사혜(太史鞋) 등을 만든다.
조선 시대 <경국대전>에는 중앙관청에 화장 16명과 혜장 14명이 소속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는 화장(靴匠)과 혜장(鞋匠)을 통칭하여 화혜장(靴鞋匠)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 시대에는 다양한 가죽신을 만들어 신었다. 가죽에 기름을 먹여 물에 젖지 않는 신도 있고, 바닥에 징을 박아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 신발도 있다.
특히 가죽에 꽃수를 놓은 비단을 덧댄 꽃신은 명품대접을 받았다.
다양한 가죽신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수요가 많았다는 말이고, 이는 엄청난 양의 소고기를 소비하면서 부산물인 소가죽이 충분히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백정, 기생, 갖바치, 재인 따위를 천민이라고 한다.
천민은 곧 노비인데 위의 사례 중에서 천민은 기생 중에서 관기(官妓)뿐이다. 관기도 1801년에 모두 없어졌다.
백정, 갖바치, 재인은 모두 평민이다. 심지어는 공무원 신분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평민이라도 천한 직업을 가졌기에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라는 것도 논리가 없고 몹시 궁색하다.
하루 1000마리 이상의 소를 잡아먹었던 조선 후기에 백정은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가죽신을 만들어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던 갖바치가 차별을 당할 이유는 전혀 없다.
사당패나 소리를 하는 재인들은 큰 연회장에 불려가거나 축하공연을 하면서 먹고 살았는데 놀이문화가 별로 없었던 조선 시대에 이들의 인기는 생각보다 높았다.
요즘으로 치면 좋은 고기를 공급하고 명품을 만들며 연예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생존과는 별 관련이 없지만, 오히려 삶의 여유나 문화생활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많은 돈을 벌고 인기를 누렸다.
갖바치, 즉 화혜장은 전문기능공으로 관청인 공장(工匠)에서 활동했다.
이들 중에는 녹봉을 받는 공무원도 있었고, 뛰어난 기능을 가진 수공업자도 있었다.
녹봉을 받지 못한 화혜장들은 일정 분량의 물량을 제작해주고 세금을 면제받았다. 대신 시장에서 가죽신을 팔아 돈을 벌었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다양한 신분의 사람이 등장한다. 그림이 작아서 신발의 종류를 알기가 쉽지는 않지만 대략 가죽신인지 짚신인지는 구분이 된다.
젊은 가마꾼 중에는 가죽신을 신고 있거나 짚신을 신고 있다.
주점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도 선비나 공무원과 같이 가죽신을 신었다.
활쏘기를 하던 선비는 짚신을 신었다.
그림 속에서 외출하는 여성들의 대부분은 가죽신을 신고 있다.]
가죽신은 비쌌기 때문에 잘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소고기의 소비가 많았던 시대에 소가죽으로 만든 신발은 특별한 물건이 아니고 대단히 비싸지도 않았을 것이다.
풍속화를 보면 노비로 보이는 사내도 가죽신을 신고, 나들이하는 여성의 대부분은 가죽신을 신고 있다.
반대로 도포와 갓을 쓴 선비도 짚신을 신고 다니는 모습도 있다.
회갑연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참석자 대부분이 가죽신을 신고 있다.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을 하거나 일상생활을 할 때는 간편한 짚신을 신었고, 행사나 나들이를 할 때는 가죽신을 신었다. 이는 선비, 양반이나 평민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료를 찾아보니 가죽신의 종류도 다양하다.
의례용 신발이 있는가 하면 가죽에 기름을 먹인 신, 바닥에 징이 박힌 신발도 있다. 흔하게는 여성용 꽃신이나 당혜,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신는 태사혜가 있다.
가죽에 비단을 대서 장식한 신발은 아무래도 비쌌기에 백성들은 별 장식 없이 그냥 가죽만으로 만든 신발을 선호했을 것이다.
가죽신은 소모품이다.
조선 후기의 가죽신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대략 100년 전후의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 시대는 가난했다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백성들이 신발은 미투리, 즉 짚신으로 굳어져 있다. 가죽신의 사회성에 관한 연구 자료는 찾을 수가 없다.
[미투리와 짚신은 다르다. 짚신이 일회용 종이가 컵이라면 미투리는 도자기 잔이다. ]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 오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미투리와 짚신의 차이가 엄청난데도 별로 구분하지 않는다.
짚신은 그야말로 짚으로 꼬아 만든 신발이다.
하지만 미투리는 삼, 마(麻), 모시 따위의 재료를 가늘게 꼬아 만든 실로 만든 신발이다.
일명 삼신이라고 불렀다.
짚신은 약간의 손기술로도 만들 수 있었지만, 미투리는 전문가가 만들어 파는 물건이었다.
미투리는 고급이면서도 편한 신발이었다.
짚신은 편안한 운동화나 슬리퍼이며, 미투리는 외출할 때 주로 신는다.
결혼, 제사, 공공 행사에 갈 때는 가죽신을 신었다.
소고기와 가죽신은 풍요의 상징이다.
조선 시대에 하루 1000마리의 소를 도축해 먹었다는 말도, 양반과 노비 구분 없이 모두 가죽신을 신었다는 사실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기록과 그림 속에 정확히 남아 있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