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크 케이블의 목소리
회사 근처에 청과물 가게가 있다. 이 가게엔 간판은 있지만 손님과 행인을 구분하는 문이 없다.
이 가게 앞을 지나는 이는 누구나 손님이 될 수 있다.
가게 이름은 <매일매일 싱싱한 과일 야채를 가락시장에서 가지고 옵니다>.
영업시간은 아침 8시부터 다 팔릴 때까지.
보통 세네 시면 호객하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으니까 그때쯤이면 다 팔리나 보다.
가게 앞을 지날 땐 약간의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 싸게 파는 데라고 입소문이 났는지 물건을 무지막지하게 ‘끌차 떼기’하는 할머니들로 북적여서 멍하니 정신 놓고 가다간 끌차에 발을 밟힌다거나 장바구니에 옆구리를 가격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가해자’는 목표한 물건을 다른 손님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온 정신을 좌판에 꽂고 있기 때문에 행인을 신경 쓸리 만무하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 알아서 잘 피해 가야 하는데 손님이 유난히 많은 날에 나는 왈츠를 추는 것처럼 그 길을 빠져나가곤 한다.
이 가게는 사계절 열려있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여름에, 빨갛고 노란 과일의 과즙을 입안 가득 채우고 싶은 여름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색색의 채바구니에 감자며 브로콜리, 토마토, 오이, 양파, 참외, 자두 같은 청과가 소복이 담겨있고, 그날 형성된 시가가 바구니 앞에 붙어있다.
어제 가보니 요즘 제철 과일 참외가 네 알에 4천 원이다. 싸다!
이곳의 물건은 확실히 싸고 먹을 만해 보인다. 한눈에 봐도 아주 싱싱해 보이거나 탐스러워서 살까 말까 고민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사는 게 아니라, 외려 가격을 보고 먹을 만하겠다는 마음을 들게 해서 박리다매 전략으로 몇 년째 성황리에 운영되는 가게이다.
가게 맨 앞에 나와 호객을 하는 남자는 비주얼 담당이다. 말하자면 ‘센터‘다. 직원 다섯 중에 키도 제일 크고 몸도 곧다.
자기도 그걸 아는지 멋을 좀 부린다.
콧수염을 클라크 케이블처럼 길러본다든지, 민소매 티셔츠의 스타일을 좀 더 쫀쫀한 스판으로 바꿔본다든지, 얇은 금목걸이를 두르고 온다든지 젊어서 그런가 바빠도 할 건 한다.
그는 굵고 커다란 목소리로 뭐가 삼천 워언, 뭐가 오천 워언, 하고 허공에 대고 외치는데 유심히 들어봐도 뭐가 몇 천 원이라는 건지 잘 들리지 않는다.
남자의 목소리는 빈 드럼통에서 왕왕 울리는 소리 같다.
너무 공명이 커서 정작 내용 전달이 안 되는데, 얼마라는 정보보다 여기에 뭔가를 싸게 팔고 있으니 일단 와보시라는 호객 효과는 확실하다.
상인의 호객하는 목소리가 클수록 싼 걸 판다. 보통 고급스럽고 값비싼 물건을 파는 점원은 소리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격에 걸맞은 애티튜드란 점잖을 빼는 것인지.
나는 이 가게에 대해서 떠들고 있지만 물건을 산 적이 없다.
출근길엔 마음이 바쁘고, 직장인의 유일한 휴게시간인 점심시간엔 두 손 두 발 자유롭고 싶고, 퇴근길엔 빨리 집에 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쩐지 이 가게는 늘 궁금해서 지날 때마다 오늘 파는 물건이나 가격, 사는 사람들, 파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게 된다.
오늘 클라크 케이블이 오른팔에 새 문신을 했다. 팔에 새로 새겨진 천사의 날개가 그에게 어떤 에너지를 전해 주는지 그의 목소리가 더욱 우렁차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쳐서 황급히 눈을 돌렸다. 오늘도 물건을 사진 않을 거라서 그렇다.
나는 클라크 케이블의 호객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여름을 떠올린다.
눈을 살짝 치켜뜬 채 허공에 대고 그가 외치는, 뭐가 이천워 언, 뭐가 삼천워 언, 소리에 아, 여름이 다시 찾아왔구나 느낀다.
이제 정말 여름이구나.
*배경화면: 언스플래쉬 이미지 무료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