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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삿포로!

by ondo

그나 나나 일본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의 마음은 모르겠으나 나는 일본이란 나라를 굳이 가고 싶지 않다고 오랜 시간 생각했다.


그곳에 이득이 되는 무어라도 보태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 일본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침략, 피, 군홧발, 개머리판 같은 야만의 단어가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마음을 움츠린 채 눈을 흘기게 되는 것이다.


1920년대에 태어난 할머니와 오랜 시간 함께 살았던 경험이 이런 험악한 심상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을까.

부끄럽게도 내 마음은 단 하나의 선명한 길이 아니라서 역시 펜은 파이롯트의 쥬스업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여름날 오후 짙은 녹음 아래서 수박을 먹을 땐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을 펼쳐 그가 활자로 만든 여름 별장에 머물다 오곤 한다.


나는 성미가 곧은 사람이 못된다. 적극적인 소비를 하지 않는 것과 마음을 다 주지 않는 것에서 스스로 위안을 삼고 만족하는 시들한 사람일 뿐. 나는 가끔 내가 이토록 보잘것없어서 콧속이 간질간질하다.


밝고 마른 햇볕 냄새가 나는 가을 아침 나는 항공사에서 온 광고 이메일을 열어보고 삿포로 항공권을 끊었다.


‘여행의 힘을 믿어요.’


하늘, 구름, 설원과 침엽수.


고민과 갈등의 흔적 없는 설원.

빈틈없이 단단한 단 한 그루의 나무.

그 순진한 풍경을 보고 나는 삿포로에 가고 싶었다. 어수선하고 얼룩덜룩한 내 일상을 단 하나의 색, 흰색으로 덧칠하길 원했다. 단 며칠이라도 눈의 무결한 흰 점들이 나를 뒤덮어주기를 맹렬히 바라며.


11월 말이 되기까지 나는 매일 그곳의 일기를 확인했다. 눈이 와야만 했다. 굵고 무겁고 순진한 눈이 내려야 했다. 눈이 오지 않는 삿포로의 힘은 믿을 수 없으니 하늘에 바라고 땅에 바랄 수밖에.


땅에 떨어지는 기도는 없다. 우리가 도착한 24일부터 눈이 내렸다. 공항에 내려 삿포로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금요일 저녁 7시.

기차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한 주를 또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과 주말을 맞이하는 느슨한 행복으로 차 안 공기가 기분 좋게 술렁거렸다.


팔을 올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는 것조차 폐가 될 만한 딱 1인의 차렷자세 공간에서 나와 남편은 기차 문이 열릴 때마다 목을 뽑아내어 푸른 밤을 향해 길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우린 얼굴을 마주대고 소리 없이 웃었다.


삿포로역을 나오니 눈이 많이 쌓였다. 여전히 눈은 같은 기세로 내렸다. 우린 하나의 우산을 나눠 쓰고 지도를 보며 숙소를 찾았다. 역사 인근 호텔을 예약했는데 초행길이고 눈이 옆으로 쏟아져 멀게 느껴졌다. 걸을 때마다 빨간 부츠의 절반이 눈 속에 빠졌다가 나왔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양말이 젖었다.


“눈이 어떻게 이렇게 오지?”

남편의 말은 우스운 농담이 아닌데 웃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겁고 긴 눈이 우리의 어깨를, 발을, 입술을 덮었다. 눈은 우리에게 자비 없이 폭력적으로 굴었다. 가학을 즐거워하는 마음은 자기 파괴를 종종 원하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나는 고단했지만 행복해서 남편의 팔짱을 끼고 큰 소리로 웃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양말을 갈아 신으니 저녁 8시가 넘었다.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삿포로역과 연결되어 있는 쇼핑몰, 스텔라 플레이스의 식당가로 올라갔다.


한국에서 미리 찾아놓은 회전 초밥집을 헤매지 않고 바로 찾아 기뻤지만 예약이 마감되었다는 안내를 받았다.

남편은 원래 섭식에 열중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 역시 식도락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 아니라서 근처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다.

카레를 파는 집이었다. 삿포로에 오면 먹어봐야 한다는 수프카레도 메뉴에 있어서 내심 기뻤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듯 보이는 앳된 여자 종업원이 우리에게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분이 상쾌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제스처, 작은 미소를 머금은 입가를 보고 내가 충분히 그 가게에 녹아든 손님이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일을 하고 당신은 나의 손님이니까 나는 당연히 걸맞은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마음일 것이다. 아마도. 다정 또한 서비스일지 모른다. 안다. 알면서도, 그녀의 속내는 다를 것이라 짐작하면서도 그녀와 나의 거리는 어차피 거기까지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회적 거리와 성긴 인연 안에서 피상적인 다정함조차 ‘오버’인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나는 그녀가 상냥하고 귀여워서 하마터면 짓궂은 장난을 칠 뻔했다. 남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게 눈을 흘기고 그녀에게 스미마셍이라고 말했다.


커다란 덩어리로 잘린 파프리카와 연근, 감자, 당근 그리고 닭고기 다리와 흰 밥 위에 카레가 얹어 나왔다. 카레는 특별히 맛있는 카레맛은 아니었으나 시차 없이, 사는 공간의 엄숙한 경계를 넘어온 우리의 여독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한 끼였다.


뜨끈한 밥 숟가락 위에 당근 한 덩어리를 얹고 카레를 적셔 위장으로 넘길 때,

상냥한 그녀가 내게 몇 번이고 돌아와서 메뉴를 제대로 알아들을 때까지 낯선 억양의 영어로 설명해 줄 때,

나는 삿포로의 눈 오는 푸른 밤을 생각했다.


눈이 언제까지 올까. 계속, 그침 없이 왔으면 좋겠다. 모든 게 다 하얗게 덮였으면 좋겠어.


눈은 우리가 삿포로에 머무는 나흘 내내 내렸다.

눈의 결정들이 꽉꽉 들어찬 무거운 눈이 내려 온 거리를 하얗게 뒤덮고, 나의 얼룩진 일상도 덧칠했다. 0으로.

나는 노동의 공간으로 돌아와서 그 덜어낸, ‘뺌‘의 힘으로 얼마간 잘 살아냈고, 그 힘을 기억하기에 다시 11월의 삿포로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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