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수업 당시 청록파 시인 중 하나인 박두진 선생님이 당신의 시 「묘지송」(1939)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선생님은 이 시를 쓰기 위해 경기도 양평 양수리 강가에 있는 양지 바른 무덤을 찾아 하루 종일 그곳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무덤 속의 주검이 듣는 멧새 소리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을 표현하기 위해 종일 새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고도 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무덤과 죽음이라는 것이 어쩌면 참 평화롭고 행복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평탄하기 그지없는 프라하 시내에, 2~3백 미터 정도의 높이가 되는 언덕이 몇 있다. 그중 하나가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프라하 궁성이 있는 언덕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비셰흐라드 성이 있는 언덕이다. 비셰흐라드는 전설상이기는 하지만 프라하라는 도시가 시작된 성지로 얘기된다.
비셰흐라드 성은 블타바 강을 바짝 끼고 다소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져 강을 안고 도는 프라하 시내를 바로 코밑에서 구경할 수 있는 장소인데, 이곳에는 관광객들이 더러 찾는 국립 예술가 묘지도 있다.
이 묘지에는, 체코의 국민 시인 얀 네루다, 극작가 차페크, 음악가 드보르작과 스메타나, 화가 알폰소 무하 등이 묻혀 있다. 베토벤, 슈베르트 등이 묻혀 있는 비엔나의 중앙 공동묘지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지만, 고인의 조각상, 각종의 조각 작품들이 묘역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이 비슷한 일면도 있다.
이들 묘역의 장식된 묘비들을 보고 돌아다니노라면 마치 하나의 박물관, 미술관을 구경하고 다닌다는 생각도 든다. ‘묘지의 미학화’라고나 할까?
그런데 유럽의 많은 묘지들이 그러하듯이, 이 묘지 역시 바로 옆에 있는 성 베드로 바울 교회로 길이 이어진다. 이를테면 이 묘지는 교회의 부속 묘지이다. 성 베드로 바울 교회는 네오고딕 건축물로 언덕 위에 솟은 58m 쌍둥이 첨탑은, 블타바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노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아름다운 묘지를 둘러보고 나와서 교회 앞의 고요한 벤치로 나와 걸터앉았다. 그리곤 점점 해가 기울면서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교회의 빛과 그림자를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방금 보았던 예술가들의 묘지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 깃든 곳이다. 그러나 예술가들의 빛났던 인생을 생각하면 일면 허망한 장소이기도 하다.
반면 교회 바깥 비셰흐라드 성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과, 성곽 아래를 흐르는 블타바 강 그리고 이를 안고 도는 빨간 지붕의 프라하 시내는 걱정 많은 세상일지언정 설레고 즐거운 욕망의 순간들이 펼쳐지는 곳이다. 묘지로 가는 교회는 어찌 보면 이러한 삶의 열락과 죽음의 안식 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듯싶었다.
유럽 여행을 하는 이들은 성당 또는 교회를 멀미가 날 정도로 보고 다니게 된다. 그러나 배낭여행 중 힘들고 지쳤을 때, 성당에 들어가 회중석 장의자에 앉아서 기도를 아니, 꾸벅 졸고라도 나오면 그렇게 몸과 마음이 개운해질 수가 없다. 가끔 운 좋게 파이프 오르간에 맞춘 성가대의 리허설 장면이라도 만나게 되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나는 미션스쿨의 대학을 다녀, 재학 시절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채플에도 참석했고, 신과대학에 가서 강의도 몇 과목 들어본 적이 있다. 철학과 교수에게 이러한 얘기를 해줬더니, 젊은 시절에는 주로 보이는 것들만을 사고하려 하는데, 그 시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 본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말해줬다.
나는 박두진 선생의 「묘지송」과 같이 묘지가 궁극적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곳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단지 이렇게 묘지와 교회 앞에 서있노라면, 우주가 생겨난 이유 또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어느 누구도 영원히 그에 대한 진실을 얘기해줄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이 삶을 견뎌낼 수 있고 그 삶이 더 충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한용운의 시에서 나오는 것처럼 삶의 진실은 “알 수 없어요”이기에, 삶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흥분되며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나의 이런 이야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사진작가라도 된 양, 사진은 빛의 예술이니 어쩌니 하며 점차 짙은 그림자를 드리워 가는 성 베드로 바울 교회의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내고자 온갖 열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다.
일본 고승의 하이쿠에 이런 적나라한 고백이 있다. “만물은 모두 空이고 본래 이 몸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눈 내리는 날은 여전히 아름답고 꽃이 떨어지는 날은 여전히 설레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