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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추리 Jun 03. 2021

똥 싸고 있네!

 싸고 있네!


오늘 성산에서 제주시로 이동하는 날이다. 어제는 일출봉에 오른 터라 오늘은 지미봉에 올라 일출봉과 우도를 바라볼 참이다. 어제 일출봉에서의 느낌을 페북에 올렸더니 범준이가 다음으로 미루라고 댓글을 달았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몸이 찌뿌둥하다. 조식을 어제는 주던데 오늘은 안 준다. 맥모닝 같은 조식 나름 맛있었는데. 아침부터 약간 틀어진다.


대신 어제 사둔 컵라면으로 해결한다. 고추참치와 함께. 그리고, 후다닥 샤워를 하고 체크아웃을 한다. 날은 우중충하게 구름이 껴있다. 지미봉으로 내비를 찍고 간다. 차가 몇 대 주차되어있다.


스틱을 꺼내서 길이를 맞춘다. 데크 계단과 가마니 거적으로 이루어진 길이다. 일출봉 보다는 가파르다. 높이는 비슷한데도 힘들기는 두 배다. 거적이 많이 닳고 제법 가팔라 미끄럽긴 하다. 짧지만 강렬한 등산로로 인해 안경으로 땀이 뚝뚝 떨어진다.


지난번엔 반대편으로 올랐다. 그 코스는 계단은 없고 거적만 깔려 있었다. 오를 때는 계단이 뒤꿈치와 종아리 부담이 덜해 수월하다. 이번엔 스틱까지 찍으며 올라가니 장비 빨 덕을 본다.


약간 흐렸지만 정상의 전망은 변함없다. 360도로 탁 트인 전망, 우도와 일출봉 그리고 내수면 호수와 식산봉도 보인다. 하도해수욕장도 저 멀리 다양한 오름도 보인다. 종달리 마을과 해변을 보니 시도 한편 쓰게 되는군.



지미봉에서


평면의 밭과 바다가

입체적인 일출봉과

조화를 이루는 곳


바다도 땅도 있으며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져

새로운 풍경을 만드는 곳


날씨와 시간에 따라

빛의 농도와 각도에 따라

다름을 선사하는 곳


지미봉에 서다



한참을 정상에서 멍하니 있었다. 그저 그 느낌이 좋았다. 언제 또 여기 오게 될지 몰라서 말이다. 다들 올라올 땐 힘들어 하지만 올라와서는 탄성을 지른다. 예전 처음 올레길 걸으며 올라왔을 때 만난 한 올레꾼 아저씨도 여기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는데, 나도 그 심정과 같다.


삼십 분은 넘게 머문 것 같다. 이제 내려간다. 스틱의 길이를 최대치로 높인다. 그래야 계단 두 칸씩은 짚으며 내려갈 수 있거든.


계단이 이어진다. 내려가는 데 이 아름다운 풍경이 점점 사라지는 게 아쉽다. 거적이 이어진다. 미끄럽다 라고 느낀 순간, 그 찰나에 미끄러졌다. 왼쪽 발목이 바깥쪽으로 꺾이며 뚝 소리가 난다. 엉덩방아를 찍으며 오른손을 땅에 짚는다.


처음엔 누가 봤을까 봐 급히 일어섰다. 왼쪽 발목이 많이 아프다. 옷의 흙을 털고 다시 스틱에 의지하며 내려온다. 속도는 이미 현격히 저하되었다. 금세 내려올 거리를 한참을 쩔뚝거리며 내려왔다.


바지와 윗옷이 흙으로 뒤덮였다. 이대로는 운전하고 못 할 듯하다. 주차장 끝에 화장실이 보인다. 반팔티를 벗고 씻는다. 흙 구정물이 흰 세면대를 더럽힌다. 다 씻고 반팔티를 갈아입었다. 반바지도 벗어 새 것으로 입으니 외양은 깔끔해 보인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었다. 정형외과를 먼저 갈 것인가 아님 주린 배를 채워야 할까. 그래, 병원 가더라도 밥은 먹고 가자.


제주시에 있는 대춘해장국으로 출발한다. 도중에 기름도 바닥 나 주유소에도 들렀다. 다시 출발하는 데 ‘임시 과속 단속 중’이란 작은 표지판이 보인다. 그 순간 속도를 보니 80킬로를 조금 넘고 있다. 우측 앞쪽에 경찰이 단속 카메라를 직접 찍고 있다. 시속 70킬로 도로인데. 흑.


아파도 대춘해장국의 내장탕은 일품이다. 이제 병원으로 가야 한다. 네이버로 검색해서 한라정형외과로 향한다. 주차장은 만원이라 차 빠질 때까지 기다리란다. 발목을 만저 보니 이미 퉁퉁 부어올랐다. 그래도 빠지는 차가 있어 급히 차를 박아두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다행히도 엑스레이 상 뼈는 이상 없단다. 올레길도 한라산도 오름도 다 걸은 후에 다친 걸 다행으로 여긴다. 하늘이 도와주신 거다.


의사가 한라산 등산하다 다쳤냐고 묻는다. 아주 작은 오름 내려오다가 다쳤다고 하니 한라산이든 작은 오름이든 다치는 것 똑같단다. 그래 맞는 말씀이시지.


범준이의 댓글처럼 지미봉을 다음으로 미뤘어야 하나. 얘가 가끔씩 하는 말은 종종 현실로 나타나고 그랬거든. 예지력일까. ㅎㅎ


기브스 정도는 아니고 발목을 딱딱한 것으로 고정시키고 붕대를 감은 다음 Cast Shoes를 신겨준다. 주사를 맞고 약을 탄 후 어렵게 차를 운전해서 제주시 숙소로 온다. 환자라고 레지던스 숙소에서 장애인 주차장을 배려해주고 짐도 날라준다.


방에 도착해서 와이프에게 붕대 감은 발 사진을 투척했더니 답장이 신속하게 날아온다.


“똥 싸고 있네!”


정신이 버쩍 든다. 헛짓거리 하고 있었던 거다. 올레길 완주도 한라산과 오름도 여러 번 올랐으면 그 이후론 적당히 했어야 하는데. 이번엔 똥도 제대로 쌌다. 흑.


침대에 누워 쿠션에 발 올리고 넷플릭스 연속 재생하고 있다. 앞으로 며칠은 이런 생활을 해야 한다. 매일 걸은 사람이 걷지도 못하고 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숙소에 처박혀 있어야 된다. 밥도 시켜 먹어야 한다. 슬프다.


자발적인 고립은 작품 활동에는 도움이 될까? 진짜  싸고 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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