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나의 어릴 적 주소는, 서울 중구 광희동 2가 219번지.
을지로 어딘가에 태어났다고 하는데(정확히는 어느 병원이겠지만) 너무 어려서 기억도 못하겠고 이것이 내가 첫 번째로 기억하는 우리 집 주소다. 내가 한 살 아니면 두 살 때 이 집으로 이사를 왔을 것이다. 그리고 나 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 한글도 깨치지 못한 어린 나와 내 동생에게 이것을 외우도록 했고, 가끔 술이 거나하게 취해 귀가하는 밤이면 장난 삼아 우리가 주소를 까먹지 않고 제대로 외우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혹시 미아가 되어 길을 잃으면 파출소 같은데 들어가 주소를 말해주면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는 나와 동생에게 그렇게 이른 적도 없다. 아니면 내가 기억을 못 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주소만 열심히 외웠다. 외우고 있는 것이 안 외우고 있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아마도 그 덕분에 한글을 깨치려는 의욕이 조금이나마 생기지 않았을까? 외우면 쓰고 싶어 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대문밖엔 우리 집 주소와 아버지 이름으로 된 한자 명패가 달려있었다.
#대문
정확지는 않지만 옅은 노란 나무 대문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집수리할 때 다른 색깔로 바뀌었던 것 같고. 골목이 끝나는 구석에 우리 집과 또 한 집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은 계단을 너 댓 개를 올라야 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렇게 계단이 있었던 탓에 소위 할 일 없는 백수들이 기타 치고 노닥거리며 놀기에 좋은 장소가 되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앞서 말한 이웃집의 아들이 그때 대략 20살쯤 됐던 것으로 아는데 바로 그와 그 친구들이 아니었을까 싶다.(이상하게도 그 집과 우리 집은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건 또 우리 집뿐만이 아니었다. 그 집은 누구와도 왕래가 없었다) 하루는 너무 시끄러워 엄마가 마당 청소를 한다고 예고도 없이 바깥으로 물을 흘려보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말하지 않겠다.
#옥상 아니면 꼭대기
대문을 열고 곧장 들어가면 맞은편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다소 긴 계단이 보인다. 거길 오르다 보면 작은 옥상이 있고, 또 서너 개의 계단을 더 오르면 너른 옥상이 나온다.
우리는 웬만해서 대문을 열어 놓는 법이 없었는데 가끔 열어 놓으면 동네 아이들이 어떻게 알고 몰려와 옥상이 있는 우리 집을 기웃거리며 부러워했다.
야, 저 집은 옥상이 있어.
우아, 부럽다.
그때 난 우리 집이 그렇게 부러운가 좀 의아했다. 하긴, 마당은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닌데 그 옥상 맨 꼭대기에 오르면 우리 집 기와지붕이 발아래 있고 멀리는 을지로의 옛 서울 운동장 스탠드까지 동네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네 아이들은 그렇게 놀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옥상이 있다는 것뿐 무슨 특별한 놀이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라 난 왜 이 온통 회색 시멘트로 뒤덮인 옥상을 아이들이 부러워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 아니 사흘만 살아봐라. 우리 집도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모르긴 해도 부모님이 그 집을 계약했을 때는 바로 이 옥상 때문에 계약했을 것이다. 우리 4남매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고, 햇빛과 바람이 잘 불어 빨래 잘 마르고, 봄 되면 간장 다리기도 좋고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테니.
실제로 그곳에서 오빠와 나, 동생이 삼총사가 되어 나름 괜찮은 추억을 쌓았던 것도 사실이다. 술래잡기는 물론이고, 다방구, 구슬치기 등을 하며 놀았고, 추운 겨울엔 한쪽에 살짝 물웅덩이가 생겨 얼면 조그만 빙판이 되는데 거기서 미끄럼 놀이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곳을 옥상이라고 부르지 않고 ‘꼭대기’라고 불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엄마가 그렇게 불렀으니 우리도 그럴 줄 알고 따라 불렀다. 아마도 작은 옥상과 맨 위에 큰 옥상을 나눠 부르려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건넌방과 아랫방
모든 집엔 안방이 있다. 건넌방은 안방에서 마루를 건너서 있다고 해서 건넌방이라 하였을까?
아랫방은 왜 아랫방이라고 했을까? 사전을 찾아보니 ‘이어져 있는 두 방 가운데 아래쪽 방’이라고 되어 있다. 보통 안방은 가장 넓고 볕이 잘 들고 부모님이 쓰는 방이니 가장 좋은 방일 것이다. 그것의 반대 개념이 아랫방은 은 아니었을까? 안방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고 외진 방.
그래서일까? 거긴 햇빛도 들지 않아 낮에도 불을 켜고 있어야 했다. 건넌방은 아예 창문도 없었지만 그나마 나은 건 햇빛이 한낮엔 마루에 제법 깊이 비쳐 드는 까닭에 겨우 어두움은 면했다. 물론 그것도 해가 짧은 겨울엔 별로 해당되는 말은 아니지만.
아랫방은 창문이 있긴 했으니 축대 밑에 나 있었기 때문에 거의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천장에나 창문을 냈는데 그것도 플라스틱 슬레이트 조각으로 덮어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방문이 두 개가 달렸다. 하나는 마당으로 통했고 하나는 마루로 통했다. 건넌방 역시 창문이 없던 관계로 방문을 두 군데로 냈다.
특히 아랫방은 세를 둘 수 있도록 조그만 부엌이 옆에 달려 있었는데 초기엔 세를 두었지만 우리가 크면서부터는 세를 두지 않고 아랫방을 우리가 점령해서 쓰도록 했다. 고로 나중에 그 조그만 부엌은 더 이상 사람의 온기가 없었고 헛간 비슷하게 방치됐다.
# 물 항아리
그 조그만 부엌엔 수도 시설이 없었다. 그런 것을 보면 애초에 헛간처럼 사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세를 못 들이는 건 아니었다. 그때는 주로 연탄아궁이와 석유곤로로 음식을 조리해 먹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스 시설이 없는 것이 흠이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수도가 없다는 건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더구나 방엔 빛도 잘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를 살겠다는 신혼부부와 갓난쟁이를 둔 젊은 부부가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좀 놀랍다.
하긴 한 우물을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시절에서 벗어 난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빨래야 우리 집도 마당에 나와서 했으니 세든 아줌마와 겹치지 않게 번갈아 가면서 했을 것이다. 문제는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하면서 긴급히 물을 써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젊다고는 하나 일일이 양동이로 마당의 수돗물을 퍼 나르는 것도 힘에 부칠 것이다.
하루는 세든 아줌마가 우리 집에 안 쓰는 큰 항아리를 빌려 호스를 길게 늘여 마당의 수도와 연결해 물을 잔뜩 받아두는 묘안(?)을 발휘했다. 그러고도 물 한 양동이를 받아 옆 부뚜막 위에 고이 갔다 둔다.
모르긴 해도 아줌마는 그 항아리에 물이 찼을 때 든든했을 것이고, 물이 떨어지는 걸 볼 때 언제 다 썼을까 굉장히 아쉬워했을 것이다. 이 물이 떨어지면 또다시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어김없이 또 한 양동이의 물을 놓았다. 그게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애잔한 정물처럼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