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강
사실 우리라고 수도를 항상 편하게 썼던 건 아니다. 물론 세든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편하게 사용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시절은 왜 그리도 단수와 단전이 잦았는지.
그래서일까? 그 집을 누가 설계했는지 모르겠지만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밑에 물을 저장할 수 있는 큰 수조가 땅 깊숙이 묻혀 있었다. 우린 그걸 녹강이라고 불렀다. 이것 역시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멘트를 잘 발라 만든 것이었는데 청소를 잘 안 해주면 파란 이끼가 껴서 그렇게 불렀을지도 모른다.
깔끔한 엄마는 얼마에 한 번씩 아예 그 속으로 들어가 그곳을 솔로 깨끗이 청소를 하곤 했다. 그나마 한 겨울엔 얼어서 물을 받아둘 수도 없었다. 여름엔 수박이나 참외를 담가 두었다 먹기도 했는데 제법 시원한 게 냉장고가 흔했던 시절도 아니었지만 있다고 해도 굳이 거기에 보관해 둘 필요가 없었다.
하루는 어린 내 동생이 거기에서 놀다 그 속에 빠졌다. 그때 마침 엄마는 마실 온 이웃집 아줌마와 안방에서 대화중이었고, 언니와 오빠는 물에 빠진 동생을 구해 줄 생각도 안 하고 실실 웃고만 있었다. 나는 곧 다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가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엄마는 처음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렸으니 장난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나중에 놀라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맨발로 후다닥 뛰어가 신속하게 동생을 구출해 내는 데 성공했다.
난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 몸이 그렇게 잰 줄은. 또한 맨발로 내 동생을 구하는 것을 보면 정말 위급한 상황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인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4남매는 엄마의 영향으로 워낙에 깔끔하게 키워지고 있던 터라 맨발로 마당을 나간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당연히 엄마가 동생을 구하러 나가더라도 신발을 신고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맨발로 나갔으니까 동생을 신속하게 구할 수 있었겠지.
난 그때 어렴풋이 두 가지를 깨달았던 것 같다. 맨발로 내 동생을 구할 만큼 엄마의 모성은 위대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선 그렇게 맨발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 후 그 일은 우리 삼총사(오빠와 나, 동생) 사이에서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특히 동생을 놀려먹을 때.
물론 돌이켜보면 그건 그렇게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다행히도 엄마가 금방 건져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동생이 물에 빠졌을 때 분명 언니와 오빠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고, 내가 엄마에게 달려가 알렸는데 훗날 오빠는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 집엔 식모(예전엔 가사도우미를 그렇게 불렀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진 않겠지만 옛날을 생각해 그렇게 불러본다. 가사도우미를 비하할 마음은 전혀 없다) 언니가 있었는데, 오빠는 언니와 함께 녹강에 빠진 동생을 구하려고 했는데, 그 식모 언니는 같이 구할 생각은 안 하고 그저 웃으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난 그 말이 너무 이상하게 들렸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난 늘 오빠와 말싸움을 해서 이긴 적이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정말 그때 그 식모 언니가 뭘 했는지 기억이 없다. 확실히 기억을 해야 오빠와 싸울 밑천이 되는 건데 확실치도 않은 기억을 가지고 우겨봤자 씨알도 안 먹힐 테니 그러면 그런가 보다고 하는 수밖에. 그러다 보니 오빠가 좀 야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언니와 엄마는 뭐 때문인지 그 일을 함구했다. 둘 중 누구라도 나서서 오빠의 기억이 잘못됐음을 증명해주면 좋을 텐데 하지 않는 것이다. 하긴 그때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어쨌든 엄마가 구했으면 됐다. 설마 내 동생이 거기에 빠졌다고 죽을 리는 없겠지만 분명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좋지 않은 기억은 빨리 잊는 것이 좋다.
#가게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 동생과 똑같이 매일 10원씩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면 우린 그 길로 집 앞의 조그만 구멍가게로 가 10원어치 군것질을 샀다. 집 앞에는 구멍가게가 두 곳이 있었는데 한 곳은 비교적 크고 거리도 가까웠지만 그곳엔 잘 가지 않았다. 큰 만큼 고를만한 군것질거리가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불친절했다. 그 가게 주인이 우리가 어리다고 만만히 보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도 사람이다. 감정 있고 생각이 있다. 우리가 무엇이 아쉬워 먹을 것도 없고 친절하지도 않은 곳에 가서 우리의 소중한 돈을 쓰겠는가. 차라리 몇 걸음을 더 걷더라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곳으로 가지.
우리가 잘 가는 곳은 초가집을 개조해서 만든 가게였는데 안채는 살림집이고 거리 쪽으로 난 방이 가게였다. 작고 곱상하게 생긴 쪽진 머리를 한 할머니가 늘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는데, 창문을 크게 내서 손님이 오면 그 창문을 통해 돈과 물건을 주고받곤 했다. 우리가 큰 가게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던 건 겨우 10원어치 군것질을 사면서 너무 오래 고른다는 것이었는데, 그곳 주인 할머니는 끝까지 기다려 주고, 너무 시간을 끈다 싶으면 곱게 한마디를 흘리곤 했다. 항상 나와 동생이 가면 사장님과 사모님이 오셨다고 반가워했다. 그 주인 할머니야 우리가 귀여워 그렇게 부른 거겠지만 자꾸 그러니까 난 이다음에 크면 동생과 결혼을 해야 하는가 의아스럽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가끔은 젊은 아저씨가 가게를 지키곤 했는데 아마도 할머니의 아드님 같았다. 난 그 가게를 초등학교를 들어가서도 한동안 이용을 했는데 어느 날 그렇게 우리를 살갑게 대해주시던 할머니가 사납게 대하는 것이었다. 군것질 하나 고르기를 너무 시간을 끈다고 뭐라고 하는 것이었다. 소심했던 나는 그 후 그 가게를 잘 가지 않게 되었는데 얼마 후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 그 앞을 지나가다가 대문에 걸린 조등을 보면서 정말로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실감했다. 이제 다시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섭섭하긴 했다.
그 시절 동생과 함께 사 먹었던 건 주로 크림빵이나 라면땅 같은 과자류, 풍선껌, 하드(아이스바), 막대 사탕 등이었고, 그나마 얼마 후엔 10원으로는 더 이상 사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