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을 마치고 나오면서 마시는 바나나 우유
#목욕탕
아궁이는 방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집은 한마디로 모든 게 분리되어 있다. 일명 변소라고 부르는 화장실도 대문 옆에 있었고, 목욕탕도 실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외에 있었다. 그래서 씻으려면 슬리퍼를 신고 몇 발짝 되지도 않는 마당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그 안엔 욕조 대신 물을 받아두는 수조가 있었다. 그리고 목욕탕 바깥 구석진 곳에 아궁이가 있어 연탄불로 물을 덥히곤 했다.
그 시절엔 집에 목욕탕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름엔 마당에서 씻고 추울 땐 부엌에서 씻으면 됐다. 그러니 그런 목욕탕이라도 있으면 좋은 집이었던 것 같다.
나와 동생은 너무 어려서 한 겨울엔 방에서 씻은 적도 있다. 좀 커서는 동생과 나도 목욕탕에서 목욕을 했는데, 지금도 파는 이태리타월은 까칠까칠한 빨간색으로 주머니 같이 생겼다. 거기에 조그만 손수건을 넣어 빵빵하게 부풀려 엄마는 우리의 묵은 때를 벗겼다. 그러면 어찌나 세게 밀어대던지 살갗이 벗겨질 정도다. 그러니 아프긴 얼마나 아프겠는가. 난 그게 엄마가 내가 미워서 그런 데서 복수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상상한 적도 있었다. 너무 아파 온몸이 다 오그라들 정도였다.
물론 언젠가 너무 아프다고 항의한 적이 있긴 하다. 그러면 엄마는 지우개 밥처럼 까맣게 밀려 나오는 때를 가리키며 네가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라며 입을 다물게 했다. 엄마의 때밀이는 겨울에만 했던 연례행사였는데 그 겨울이 가기까지 두 번쯤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겨울이 왔다고 한 번, 겨울 간다고 또 한 번.
#공중목욕탕
우리가 집안에 목욕탕이 있다고 공중목욕탕을 안 다녔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조금 커서는 공중목욕탕을 다녔다. 나는 처음 가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너 나할 것 없이 여자들이 벌거벗고 목욕을 하는데 또 다른 신천지를 보는 것 같았다. 거기에 내 동생도 가끔 같이 갔는데 집에서 같으면 같이 하지도 않았을 텐데 여기선 그런 걸 따지고 할 것도 없었다. 목욕탕에서도 아주 어린아이는 성(性)이 다르더라도 보호자와 함께 오면 출입을 허락했다.
놀라운 건, 욕탕이 수영장만큼이나 크고 넓었는데 마침 어떤 여자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숨도 안 쉬고 잠형을 했는데 신기하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목욕탕은 좁아서 불편했는데 공중목욕탕은 마냥 있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이 맛에 여길 오는구나 그도 중독이 될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그곳엔 떼를 밀어주는 젊은 아줌마가 있었다. 나는 성격이 좀 내성적이라 낮을 가려 처음엔 꺼렸는데 맡겨보니 예의 엄마가 미는 것보다 훨씬 덜 아파 좋았다.
그때는 공중목욕탕이 워낙에 보편적이라 학교에서 공중목욕탕 수칙을 따로 가르칠 정도였다. 이를테면 물을 너무 많이 사용하지 마라, 욕조에 들어가려면 1차 샤워를 하고 들어가라, 다른 사람 생각해서 욕조 안에서 떼밀지 마라 등등.
어느 날 목욕탕을 갔더니 이 모든 수칙을 위배한 문제의 사람을 발견했다. 어느 초로의 할머니였고 딸들과 함께 온 것 같았는데 수도를 세게 틀어놓고 물을 얼마나 억세게 퍼붓던지 시쳇말로 뽕을 빼겠다는 각오로 온 것 같았다. 인상도 별로 좋아 보이지도 않아 그럴 수도 없겠지만 학교에서 배운 것을 말했다가는 뺨이라도 맞게 생겼다. 그저 안타깝게만 바라봤고, 그날은 내가 목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입맛이 영 썼다.
그래도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서 마시는 바나나 우유는 가히 그 행사의 백미는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