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미술이란?
암흑 같았던 청소년기의 끝자락에 나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이규현의 그림 쇼핑"
이 책은 내게 여러 의미가 있다. 가정의 어려움으로 청소년 시절 내 곁에 있어주지 못한 아빠의 절절한 부정(父情)이자, 그런 아빠에게 오해를 풀고 마음의 문을 열게 한 선물이다. 무엇보다 내 미래를 결정하고 유학을 결심하게 한 이유였으니,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가 미술계를 취재하면서 겪은 일들을 예술이 아닌 시장의 관점으로 쓴 이야기이다. 아마도 미술시장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한 2007년 즈음이었으니, 당시로는 굉장히 센세이션 한 시각이었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미술품이 재벌 사모님과 며느리의 조용하고 은밀한 취미활동 또는 그럴듯한 명함이 필요할 때 활용도 높은 사업모델, 기업의 자금세탁 용으로 이용되던 때라 당연히 월간지 일간지에는 미술시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보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조선일보 키즈로 컸다. 물론 아빠는 시민이 만드는 한겨레 신문사라는 모토에 딸에게 주식 100주를 선물할 만큼 한겨레 21의 애독자였지만 조선일보만큼 시대의 흐름을 빠르고 날카롭게 보는 신문이 없다시며 조선일보도 함께 구독하셨다. 여느 신문사보다 조선일보가 보는 문화예술계의 흐름은 빨랐고 정확했으며 시대를 선도했다.
그 덕에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의 책이 신문에 소개되었고 아빠는 그 책을 나에게 선물했다. 나는 그 책을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궁금한 내용을 기록해서 30개가 넘는 질문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미술 쇼핑이라는 책에 매료된 나는 신문 기사 말미에 적힌 메일로 편지를 썼다. 구구절절 감상문을 썼고, 내 미래의 목표와 꿈도 말했다. 그렇게 20살의 병아리는 처음으로 용기 있게 삐약삐약 존재감을 알렸다.
며칠 후 기자님은 내 메일에 답변을 주시면 개인 메일과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그리고 신문사로 한번 찾아오라고 했다. 그렇게 2007년 여름 나는 광화문 세실리아 카페에서(지금은 사라짐) 기자님을 만났다. 상하이에서 울산으로 울산에서 서울로 온 나를 기특하게 봐주셨고, 벌벌 떨며 손에 쥔 수첩 속 질문을 모두 다 해보라고 했다.
기자님에서 선생님으로 인생의 선배이자 내 일의 멘토로, 그렇게 15년째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이집트에 계시다가 오랜만에 귀국하셔서 오늘 우리 갤러리에 잠시 왔다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집에 돌아와 간단한 인사를 남겼는데,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말과 함께 지금의 경험들이 값진 자산이 될 거라며 오래오래 이렇게 보고 지내자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30대의 중반이 되었고, 미술시장으로 15년째 공부와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너무 느린 것 같아서, 나의 한계와 부족한 역량에, 어이없는 처우와 환경에 미술계를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오늘 선생님과 대화를 하며 다시 이 자리를 잘 지키고 성장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의 병아리가 지금은 제법 선생님과 미술계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성장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같이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의 인연이 참 재밌다는 말에 20살 열정 넘치던 내가 떠올랐다. 미술계를 뛰쳐나갈 때 나가더라도 의미 있는 발자국은 남겨야지. 그 전엔 못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