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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활을 버티게 한 힘

아빠의 편지

by 인생은 아름다워



어제오늘 부모님의 이사로 본가 이사준비와 정리를 도왔다. 짐을 보내고 짐을 받고, 잡다한 일련의 과정을 부모님이 다 하셨고 나는 그저 짐 정리 정도를 도왔다. 그랬는데도 꼬박 이틀을 정리했고 마무리하지 못한 일은 엄마에게 맡겨두고 서울로 간다.


이삿짐을 싸고 푸는 일에 가장 흥미로운 점은 숨어있던 짐들을 발견하고 추억여행을 떠나는 일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책장에서 발견한 유학초기 아빠의 편지를 보며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에 감탄했다.


2007년부터 시작된 유학생활은 나는 상하이에서 아빠는 울산에서 동시에 공부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간지, 월간지를 자르고 모아서 아빠는 내가 꼭 봤으면 하는 자료를 몽땅 상하이에 있는 내게 보내주셨다. 아빠가 먼저 읽으면 내 의견을 더해 끝장토론이 시작된다. 좋은 점과 아쉬운 점, 배워야 할 점과 꼭 기억해야 할 점, 그리고 시사점 등을 살펴보게 하셨다. 말로만 들으면 세상 다정하고 스윗한 아빠 같지만, 실상은 무척 엄격하셨고 계속해서 나의 의견을 말로 글로 표현하게 하셨는데 이 일은 정말로 힘든 과정이었다.


유학생활은 너무도 고단하고, 여러 어려움 앞에서는 나는 집안의 환경을 탓하며 나의 부족함을 면피할 방법을 찾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는 물러서지 않고 그 환경에서 내가 취해야 할 태도와 남다른 인사이트를 요구하며 더 강하게 나를 밀어붙이기도 하셨다. 그러면 포기한 나는 대게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집중했고 그런 딸을 보며 아빠는 수많은 편지로 마음을 달래주셨다.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섞어가며 유학생활에 긴장과 즐거움을 알게 해 주셨는데 내가 아빠였다면 결코 해줄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아빠가 파일 한가득 스크랩북을 만들어주신 게 20권도 넘지만 중국에서 가져오지 못한 몇 권은 지금도 큰 후회로 남는다. 15년이 넘은 시점에 다시 아빠의 스크랩을 보니 부모님의 사랑이란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이제야 가늠이 된다. 엄마아빠의 사랑과 헌신으로 지금의 내가 있는데, 생각해 보니 부모님의 정성에 비해 결과물이 시원찮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겁다.


공부를 더 깊이 있게 했어야 하고, 돈을 더 많이 벌었어야 하고, 미술계에 훨씬 더 많이 이바지할 수 있는 인물이 됐어야 했는데... 이도저도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30대 중반을 넘어가니 이제는 어떠한 이유로도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구나 싶다. 공부는 쉬지 않고 돈은 더 열심히 벌어야 하는데, 일개미로 쳇바퀴 도는 나는 도통 방법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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