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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민 Feb 09. 2020

사실적 기록의 연습1

우리 집 침대는 조금 높은 편이다. 아내가 자는 왼쪽으로는 벽이 있고 콘센트가 있지만, 내가 자는 침대의 오른쪽으로는 콘센트가 은근 멀리 있다. 때문에 자기 전 폰을 보다 충전해야 할 때나 일어나서 폰을 다시 가져올 때는 이불에서 얼마간 벗어나야 한다. 자기 전, 침대에서는 주로 웹툰을 보고 캘린더에 내일 할 일에 대해 적어놓는다. 블루스크린이 잠을 방해한다고 하는데 그마저도 늦은 시간까지 보고 있다 보면 몰려오는 졸음을 어찌할 수 없다. 어김없이 새벽 한 시를 넘기고서야 이불에서 잠시 벗어나 폰을 충전시키고 잠을 청한다. 사실 열한 시부터 졸렸는데도 말이다.


아침에 기지개를 켜고 밤새 충전을 마친 아이폰을 충전잭에서 분리한다. 이불에서 벗어난 지 5초도 안됐는데 몸에 차가운 기온이 와 닿는다. 아이폰을 손에 쥐고 재빨리 이불속으로 돌아간다. 비행 스케줄로 해외에 체류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집에서 교정기 보조장치를 하고 자는데, 착용한 채 자고 일어나면 이를 악물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더 피곤하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왠지 아귀 근육이 당기는 느낌을 받는다. 때마침 아래쪽 사랑니가 골머리를 썩힌다. 치과에 가야겠다 생각한다. 피부에서 미끄러지는 보드라운 겨울 이불 안으로 들어가 네이버 앱을 켠다. 네이버 메인화면에 '입춘'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오늘이 입춘, 봄이 오는 날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덩달아 잠에서 깬 아내에게 말을 꺼낸다. 오늘이 입춘이라고. 잡곡밥 먹는 날이나 나물밥 먹는 날 등 특별하지만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날들을 기억하고 사는 사람처럼 나는 늘 그런 소식을 전하는 편이다. 입춘일이라는 걸 알고 나니 괜스레 따뜻해진 느낌을 받는다. 이런 날은 집에서 쉬기 아쉬워 침대를 박차고 나온다. 아침 겸 점심을 차려먹고 외출 준비를 마친다. 베란다로 바깥 하늘을 바라본다. 생각과는 달리 흐린 하늘에 다시 추워진 듯하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동남아에 있다가 왔던 터라 옷가지를 어떻게 입어야 할지 감을 못 잡는다. 고민한 끝에 가벼운 옷에 조금 더 크고 가벼운 옷, 그 위에 좀 더 크고 가벼운 옷으로 겹쳐 입는다. 옷에 어울리는 양말을 신고 신발을 고른다. 깔끔한 검은색 스니커즈를 신고 마지막으로 검열에 들어간다. 입춘에 어울리는 패션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봐줄만하다. 순조롭게 밖을 나선다.


입춘,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날, 날씨는 올 겨울 최저기온을 기록한다. 속은 듯한 기분이지만 생각해보면 봄은 마지막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춥고 쌀쌀하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베란다로 바라본 하늘처럼 흐렸다. 전철역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린다. 스니커즈 속 발바닥은 벌써부터 느낌이 없었고, 발가락은 오므렸다폈다를 반복하며 아직은 견딜만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전철이 도착한다. 내가 서있던 쪽에 자리가 나 엉덩이가 따뜻하게 앉아 간다. 몸이 녹으면서 입춘이란 말이 다시 생각난다. 그때, 반대편 큰 창 너머로 하얀 눈 같은 것들이 흩날리는 것을 발견한다. 눈의 양은 점점 더 많아지더니 창문으로 찰지게 달라붙는다. 심지어 쉽게 녹아내리지도 않는다. 입춘에 내리는 눈, 오묘하게 잘 어울린다. 문득 1년 전 입춘은 어땠는지, 내년의 입춘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올해 봄 처음으로 맞은 눈이다. 전철이 목적지와는 두 정거장 전인 역에 도착한다. 큰 비프음이 울리며 문이 열리고 추위와 눈발이 함께 내 한쪽 볼과 팔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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