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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Sep 16. 2024

즐거운 나의 집.

18화. 트라우마.

언제나 퍼렇게 날이 선 칼날처럼 새벽의 여명을 불면의 끝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로 맞이하던 민주의 아침은

이제 청각이 아닌 후각으로 시작되었다.  사무엘과 함께였던 뉴욕 가브리엘에서의 일상처럼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그녀의 아침을 깨웠다.  최근 잘 먹은 덕분인지 수면제 없이도 잠을 자게 된 그녀는 눈을 감은 그대로 코로 맡아지는 행복의 기운을 숨을 쉬듯 들이쉬고 내쉬었다.  

처음엔 충동적으로 선우에게 자신의 집안일 도우미를 제안했지만 그가 이 집을 드나들기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은 지금은 그 이전의 생활을 떠올리는 것조차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물론 남자인 선우가 자신의 집을 드나드는 일이 겁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거의 없는 민주에게는 다른 사람들 눈에 선해 보이는 선우일지라도 예외적인 리스크(위험요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직업병이라며 스스로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그녀는 선우를 향한 탐색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예민한 눈초리를 느낀 탓인지 그녀의 집에 드나든 지 일주일 정도가 된 금요일 오후 그녀는 그에게서 온 문자를 받게 되었다.


[저녁에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메뉴 알려주세요.  할 얘기가 있어요.]


그의 문자를 받은 그녀는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사무엘이 만들어준 토마토 수프, 빈과 스크램블, 그의 특제 애플파이......'


떠올리는 것 모두 이제 먹을 수 없는 것들이란 생각이 떠오른 민주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찍어 눌렀다.  순간 어린 시절 그녀가 몸이 안 좋을 때마다 엄마가 해줬던 콩나물죽이 떠올랐다.  뿌리가 연하고 길이가 짧은 콩나물을 넣고 죽을 쒀서 계란물을 풀어 섞고 참기름을 살짝 섞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콩나물죽을 떠올린 그녀는 순간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스마폰으로 그의 문자에 답을 했다.


[콩나물죽이 먹고 싶어요.  그게 될까요?]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에게서 곧바로 답 문자가 왔다.


[물론이죠.  평소 퇴근 시간 맞춰서 준비할게요.]


그의 문자를 받은 그녀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돈을 벌어야 했던 엄마는 항상 그녀보다 늦게 집에 왔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를 반기는 건 사무엘이 유일했던 그녀에게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상상만으로도 그녀는 왠지 마음이 간지러운 것 같았다.  

지점장실에 결재를 받기 위해 들어온 김대리는 어쩐지 평소와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지점장을 연신 흘끔 대다

밖에 나와서 창구 직원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지점장님 요새 연해?  사람이 처음하고 달라진 것 같아.]


김대리의 메시지에 한미소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른 사람 사생활 신경 끄고 일이나 하세요.]


답쪽지로 김대리에게 단호박을 날렸지만 미소의 눈에도 오후부터 지점장의 모습은 이상해 보였다.  


'왠지 붕 떠 있는 느낌인데......'


민주는 자신의 설레는 마음이 '콩나물 죽' 때문이라고 되뇌었지만 끝내 평소보다 삼십 분 빠른 시간에 가방을 들고 은행을 나섰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하는 그녀의 뒷모습에 따라붙는 청원경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서둘러 은행 지하에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띡띡띡 띠띠 띠리릭'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선 그녀를 맞이한 것은 따뜻한 음식 냄새였다.  뒤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주방에서 한 손에는 국자를 들고 앞치마를 한 선우가 현관에서 구두를 벗는 그녀를 반겼다.


-"오늘도 고생 많았죠.

  거의 다 됐어요.  어서 손만 씻고 오세요."


'고생 많았다'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순간 가슴에서 큰 덩어리 하나가 뻐근하게 올라옴을 느꼈다.


'아.. 나..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다시 서둘러 주방으로 돌아가 국자로 냄비를 젓는 그의 뒷모습을 본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안방 욕실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을 재정비했다.  그렇게 평소처럼 업무상의 얼굴로 무장한 그녀가 식탁에 앉자 그는 그녀의 앞에 콩나물죽 한 대접을 놓아주었다.   

그 옆에 물컵도 놓아준 그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어서 수저를 뜨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녀의 식사를 격려라도 하듯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선우의 눈빛을 본 민주는 수저로 대접의 모서리에서 가만히 죽을 떠올려 그 한 수저를 떠먹었다.  


죽 한수저를 떠먹은 순간 그녀는 잘 퍼진 쌀알에 깃든 콩나물의 시원한 감칠맛과 참기름의 고소한 맛 그리고 부드럽게 섞인 계란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망가진 위장을 걱정한 선우는 그녀의 집에 처음 온 날부터 계속 아침저녁으로 그녀에게 여러 가지 죽을 끓여 주었다.  이미 지난번 쓰러져 입원했을 때 선우가 끓인 죽을 처음 먹었을 때부터 그의 요리를 인정했었지만 그가 끓인 콩나물 죽은 솔직히 엄마가 끓여줬던 것보다

훨씬 맛있어서 그녀의 수저질은 더욱 바빠졌다.  

허겁지겁 한 대접을 비운 그녀를 본 선우는 부지런히 주방으로 가서 다시 죽 한 대접을 떠 온 뒤 그녀의 앞에 놓아주었다.  죽 두 그릇을 순식간에 비운 그녀가 고개를 숙였던 대접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우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얼굴이 확 붉어진 그녀는 멋쩍게 물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그의 자리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선우 씨는 왜 같이 안 드세요."


그녀의 말에 가만히 미소를 짓는 그의 선한 눈웃음을 본 그녀는 순간 그가 참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집에 오는 거 많이 불편하시죠."


그녀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서로 이해관계에 의해서긴 하지만

남자가 출입하는 것이 불편하고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도움이 꼭 필요했던 그는 어떻게든 그녀가 느낄 불안을 해소해주고 싶었다.  그의 말에 선뜻 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이성(異性)에 트라우마가 있어요."






고급룸에서 주리아의 손길을 거부하고 뛰쳐나온 뒤 선우는 연예계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단역 오디션도 보고 포트폴리오도 여러 곳을 쫓아다니며 제출했지만 돌아오는 건 거절뿐이었다.  그가 소속되어 있던 매니지먼트사는 손해배상 청구를 안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선처를 한 거라며 그를 손절했고 나이가 이미 서른이 넘은 그는 앞으로의 생계를 어찌 꾸려나갈지 앞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손을 꼭 잡고 공인중개사를 하면 밥은 먹고 산다는 얘길 들었다며 그를 학원에 등록시켜 주었다.  그렇게 어렵게 다시 공인중개사로서의 삶을 꿈꾸던 그는 흑석동에 세 평짜리 부동산 사무실을 열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모니터로 인근 지역의 매물을 검색하고 있을 때 중년의 여성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님인 줄 알고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를 향해 다가온 여성이 그에게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 동작구 부동산 중개인 연합 대표 오은영이에요."


그녀의 소개에 어찌할 줄 몰랐던 선우는 내민 그녀의 손목을 조심히 마주 잡았다.  그것이 또 다른 악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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