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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Sep 23. 2024

즐거운 나의 집.

19화. 트라우마(2).


민주로부터 폭탄을 넘긴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선우의 머릿속에서 폭탄을 넘기고 싶다고 떠올린 사람은 두 명이었다.  한 사람은 그를 연예계에서 퇴출시킨 주리아였고 또 한 사람은 최근까지도 그를 힘들게 했던 오은영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공인중개 사무소를 열었던 흑석동에서 만난 오은영을 피해 어렵게 다시 얻은 사무실이 아너팰리스였건만 같은 건물 일층 반대편 모서리에 오픈한 중개사무소에서 오은영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그 자리에 굳은 채 몸을 떨었다.  

자기에게 잘 보이면 배역을 주겠다며 은밀히 자신을 더듬던 주리아와 자신의 말을 잘 들으면 흑석동에서 밥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오은영은 닮은 꼴이었다.  타인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열심히 살지 않았던 적도 없는데 왜 이리 자신의 인생은 뛰어보지도 못한 채 매번 돌부리에 걸려 바닥에 널브러지는지 그는 좌절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공인중개사의 주된 수입은 부동산 거래로 인한 중계수수료가 대부분이고 그중에는 물을 발굴해서 투자자를 모아 분양을 하는 기획 부동산, 그리고 부동산 거래가 줄어드는 경우는 공동물건을 통한 연합 중개가 이뤄지기도 했다.  특히 구역에 비해 등록된 공인중개소가 많은 경우에는 대부분 물이 겹치는 경우가 많아 공동중개가 진행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공인중개사 간의 사전 협의가 중요했다.  

선우가 처음으로 사무실을 연 흑석동은 그중 공동중개가 거래의 대부분인 곳이어서 공인중개사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같은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공인중개사들 간의 관계가 중요시되는 곳이었다.  


그의 사무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협회장 오은영의 눈에 비친 선우는 공인중개사를 하기에는 너무 반듯한

인상이었다.  젊고 잘생긴 데다 요령도 없어 보이는 그를 응접 의자에 앉아 한참을 살핀 그녀가 꼬았던 다리를 펴서 반대편으로 꼬았다.


-"이 일 이제 시작인 거죠?"


그녀의 앞에 음료수를 놓은 뒤 자신을 향한 시선에 어쩔 줄 몰라 선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네.. 네.. 처음입니다."


선우를 귀엽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고 바라본 오은영은 그의 사무실 이곳저곳을 찬찬히 둘러보다 벽면에 붙어있는 흑석동 관내 지도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이 동네가 쉽지 않아요.  이 쪼그만 동네에 도대체 중개사무소가 몇 갠지.  서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밥 먹고 살기 힘든 동네죠.  무슨 말인지 이해하죠?"


"네.. 처음이니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녀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선 선우가 그녀에게 꾸벅 절하며 부탁의 말을 전했다.

그녀는 강자가 약자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느릿하게 부탁하는 선우의 얼굴을 훑었다.


-"이번주 금요일에 동작구 관할 중개사들 모임이 있을 거예요.  거기서 정식으로 소개를 하죠."


그녀가 건네준 명함을 받고 자신의 명함을 그녀에게 건넨 선우는 출입문 바깥까지 따라나가 그녀를 배웅했다.






"이성에 대한 트라우마요?"


자신을 향해 되묻는 민주의 시선을 그제야 의식한 선우는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각에 다시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폭탄을 넘긴다고 했을 때 제가 말씀드린 그 두 명이 원인이었어요.

  그 뒤로는 여성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무섭고 겁이 나요.

 특히 신체접촉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아요."


다시 진저리를 치는 그의 모습에 민주는 지독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미국을 떠나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가 왜 자신이 집에 출입하는 것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실은 좁은 병원 탕비실에서 어머니 드실 음식 만드는 것도 너무 힘들었는데

  이 일이 제게 얼마나 필요한지 지점장님은 모르실 거예요.

  그러니 부탁드려요.  "


부탁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민주는 이제 앞으로는 마음 놓고 그가 해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겠단 생각이 먼저 들어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이후에도 선우는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집에 와서 그녀의 아침을 차렸고 병원에 들러 어머니를 챙긴 뒤 다시 집에 와서 간단한 집안 일과 그녀의 저녁을 챙기고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민주는 이제 그가 없는 생활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그가 해주는 것들에 익숙해져 갔다.  

TV에서 대일건설의 파산과 박 회장의 사망 관련 기사가 뜬 날 오후에 선우에게서 문자가 왔다.


[할 얘기가 있어요.  저녁에 뵐 수 있을까요?]


그에게서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바로 답문자를 보냈다.


[네. 저녁에 집에서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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