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가 그에게 오은영이 자신의 부동산 사무실 매매를 위해 연락이 올 거라고 말했을 때 선우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매매를 원했지만 매달 월세만 나갈 뿐 거래의 기미도 없던 아너팰리스 상가였다.
자신이 대출을 부탁했을 때도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던 그녀가 갑자기 매매가 될 거니 준비를 하라니 그로서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 표정에 드러난 물음표를 본 민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어요. 지금 설명하긴 어렵고요. 일 다 정리되면 설명해 드릴게요."
-"지점장님, 아니.. 그래도....."
자신에게 섣불리 묻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궁금한 마음이 숨겨지지 않는 표정으로 가득한 그를 본 민주가 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켜올리고는 그를 바라봤다.
"지점장님, 말고 민주 씨요. 어머니하고 있을 때도 습관적으로 나올 수 있으니 조심해야죠."
민주의 말을 들은 선우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려운 부탁을 선뜻 들어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일을 해결해 주려고 애를 쓰는 그녀의 모습이 신기했다. 지금까지 삼십칠 년을 살면서 누구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이 있었나 돌이켜 봤지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중학교 일 학년 때 반에서 옆자리에 앉은 급우가 자신을 괴롭 혀서 싸움이 났을 때도 학교로 불려 온 어머니는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만 할 뿐 그에게 왜 급우와 싸웠는지는 묻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나쁘게 하는 사람이라도 같은 행동으로 대하면 똑같이 나쁜 사람이 된다며 그를 달랬을 뿐이었다.
그때어머니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선우는 내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습생 시절에 부당한 일을 겪어도 그리고 연예계에서 퇴출된 이후에도 어머니는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사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착하게 살면 병신이 되는 세상이라는 걸.......
하지만 그는 그 부당함에 맞서는 법을 몰랐다. 아버지는 애초에 기억이 없었고 어머니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약자였지 그의 보호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착한 어머니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외로웠다.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외줄을 타는 것처럼 위태로운 세상을 끝도 없이 오래도록 혼자 걸어온 것처럼 지독한 피로감이 그를 짓눌렀다.
"폭탄을 넘기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그녀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어둠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을 느꼈다.
어디로 걸음을 내디뎌야 할지 위태롭기만 했던 어둠으로 가득한 길을 비추는 그 빛은 따뜻했다.
누군가에게 맞고 집에 들어갔을 때 자신의 어머니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를 다독였겠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말을 하는 그녀는 당장 때린 놈이 누구냐며 자신의 손을 잡고 그 집에 쫓아가 따져 물어줄 것만 같았다.
'내편 같아.'
신기하게도 그녀가 말을 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오은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민주는 오은영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 부득이한 사정으로 매매를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얘기하고 급매이니만큼 보증금과 권리금만 받는 조건으로 매매를 진행하라고 그에게 미리 조언했었다.
그렇게 매매를 진행하고 보름쯤 지났을 때 병원 로비를 지나던 그의 눈에 대형 TV화면에서 송출되는 대일건설 파산 관련 뉴스가 보였다.
이미 오은영이 매매를 위해 그에게 연락을 하기 전에 인터넷 뉴스로 주리아가 대일건설이 건설한 아너팰리스에 50억 지분 투자를 한다는 뉴스를 봤던 그는 그로부터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이제 파산이라니 너무 급속도로 진행되는 상황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간 자신에게 지금은 설명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던 민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곧바로 스마트폰으로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할 얘기가 있어요. 저녁에 뵐 수 있을까요?]
답문자는 곧바로 왔다.
그는 바로 어머니가 있는 병실에 들러 어머니의 상태를 살핀 뒤 민주의 사택 인근에 있는 대형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처음 그녀의 집에 다니기 시작해서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그녀의 악화된 건강 때문에 죽을 끓였던 그는 이제 조금씩 국 종류나 찌개도 끓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불고기 전골을 할 생각으로 장을 본 그는 부지런히 장을 봐온 재료들을 손 보기 시작했다.
워낙 오랜 시간 요리를 해왔던 그였지만 오늘따라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울분만 삼켰던 주리아와 오은영의 이름을 그녀에게 말했을 뿐인데
실제로 그들이 추락하는 모습을 자신의 살아생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도 하지 못했던 그로서는 지금의
이 상황이 기쁘지만 의문이 가득했다.
어차피 자신의 상상으로 짐작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다시 차분히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대일건설의 파산선고 기사가 뜨기 하루 전 민주는 일전에 브라이언과 만남을 가졌던 청담동 고급 룸에서
다시 그를 만나고 있었다. 그녀가 예약된 룸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와서 소파에 앉아 있던 브라이언이 그녀를 반겼다.
-"헤이... 어서 와."
기꺼운 표정으로 가득한 그와 달리 무표정한 그녀가 옷걸이에 재킷 상의를 벗어 걸고는 매고 있던 숄더백을 소파 위에 올려놓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소파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앞에 앉은 브라이언의 얼굴을 말없이 한참 동안 살피다 피식하고 웃었다.
"그림이 다 그려졌나 보구나."
그녀의 말에 브라이언이 입꼬리를 올려 빙긋이 웃고는 이미 따라놓은 스트레이트 잔을 그녀 앞으로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