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건네준 위스키 잔을 손에 들고 담긴 술을 살짝 흔들고는 그 흔들림을 지켜보는 민주의 모습을 살피던 브라이언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가 양 손바닥으로 소파를 짚고는 상체를 그녀에게로 기울였다.
-"그런데 어떻게 안 거야? 마녀라고 해도 우리가 얼마나 조심했던 일인데...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그녀를 직시하는 브라이언의 시선이 매서웠지만 민주는 무심한 표정으로 위스키 잔을 입으로 가져가 천천히 들이킨 뒤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그를 마주 보았다.
"우연이긴 했지. 그런데 있잖아. 하나가 보이니까 그다음이 보이더라.
그건 그렇고 내가 왜 너한테 그런 얘길 해줘야 하지?
내가 널 도와준 거는 사실이잖아. 내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는 알 필요 없는 거 아냐?"
그녀를 기세로 눌러보려던 브라이언은 똬리를 친친 감은 뱀처럼 자신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빙긋이 웃기까지 하는 민주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사실 그는 자신을 미국에서 스카우트해 온 유아이 대표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신이 설계한 계획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계획에도 변수는 존재했고 그 변수로 인해
전체 계획이 흔들릴 위기에 처해 고심하고 있을 때 민주의 연락을 받았다. 그녀가 제공한 정보는 시기적절하게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었고 이제 오늘 자정이 넘으면 유아이 대표인 박유재는 합법적이고도 도의적으로
대일건설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쭉정이 없는 알곡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계획의 설계자였던 그는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가 너무 궁금했고 과연 어디에서 정보가 빠져나갔는지 그 출처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다.
자신의 앞에 앉아 시종일관 여유로워 보이는 민주의 모습은 인어공주와 거래를 하는 마녀를 연상시켰다.
순간 그는 만나자는 자신의 요청에 그녀가 왜 응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절로 '끙'하는 신음을 낸 브라이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래. 내가 졌다. 말해주는 대가를 원하는 거지?"
이제야 자신이 낸 수수께끼에 답을 냈다는 표정으로 민주가 빙긋이 웃었다.
"유아이건설 거래은행 대한은행으로 바꿔줄래? 물론 내가 있는 서대문지점으로 말이지."
브라이언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항복의 표시로 손을 들어 보였다.
-"내가 너한테 정말 다 졌다. 그래, 내가 대표님한테 당장 얘길 할 테니 어서 말해봐."
민주가 대일건설의 파산과 관련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두 달쯤 지났을 때 금천구청 건설과 김인철 주무관이 그녀에게 전화를 해오기 시작했다. 주무관으로부터 독산동 재개발 계획으로 인한 토지 매입과 관련해 엄마와 공동명의로 되어 있는 독산동 집에 대한 매매동의 서류 징구에 관련된 안내를 받게 된 그녀는 잊고 싶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전화를 피하고 싶었다. 자신의 거듭된 거부에도 굴하지 않는 주무관의 전화에 그녀는 독산동 재개발 계획을 조사해 보게 되었다. 하나에 꽂히면 그걸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파해쳐야 직성이 풀리는 자신의 성격상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재개발 사업 시공사와 그 시공사에 관련된 관계자들을 파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사를 하던 중 시공사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정도 규모의 관급공사라면 메이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규모와 연식이 된 건설사가 시공사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시공사로 선정된 유아이 건설은 이제 창업이 오 년이 채 안된 신생이었다.
거기에 시공사의 하자이행 보증은 또 일군 건설사인 대일건설이었다. 그녀는 대일건설과 유아이건설의 관련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유아이 건설의 대표는 대일건설박지형 회장의 차남인 박유재였다. 박지형 회장은 평소 친아들인 차남보다 어린 시절 입양한 첫째 아들을 더 많이 의지했다. 그로 인해 대일건설의 이사회는 향후 대일건설의 경영권 승계를 놓고 둘로 나뉘었고 회장이 유언장에 첫째에게 더 많은 지분을 남겼다는 사실을 고문 변호사를 통해 알게 된 박유재는 이에 반발하여 유아이건설을 창립하게 되었다.
자신이 대일건설에 남아있어도 유언장의 내용대로라면 자신은 대일건설의 회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대일건설을 껍데기만 남긴 채 그 알곡을 유아이건설로 옮겨올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어차피 자신의 지분이 더 높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규모의 상속세를 납부하고 그 자리를 물려받는다니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던 박유재는 월스트리트에서 유명한 세무법인 S&T에서 기업인수합병 전문가인 검은 머리 미국인 브라이언을 스카우트해 왔다.
브라이언은 기업을 쪼개서 분할 판매하거나 합병하는데 특출 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냥 상속하면 엄청날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법인을 사전에 분할하고 상속 이후에 다시 합병하는 것이 장점인 브라이언은 자신을 스카우트한 박유재의 가려운 곳을 단번에 짚어내었다.
대일건설 회장이 힘을 잃게 만든 뒤 대일건설의 알곡을 빼내서 유아이로 옮긴 뒤 대일건설 회장이 죽는 날
파산 선고를 하게 된다면 부채는 대일건설에 남기면서 상속세 없이 유아이 건설로 그 모든 것을 옮겨올 수 있다는 계획을 브라이언으로부터 들은 박유재는 손뼉을 쳤다. 이미 박지형 회장의 주치의인 김원장이 자신의 사람인 이상 그의 전화 한 통화면 얼마든지 회장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회장이 쓰러지면 아직도 대일건설에서 자신의 편에 서 있는 절반의 이사들이 자신을 위해 움직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고의적으로 대일건설을 파산시키기 위한 장치로는 주상복합 아너팰리스를 준비했다.
고의 파산을 위해 아너팰리스까지 준비가 다 되어 회장의 죽음과 파산선고로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려던 그때 변수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