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정지우 작가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책의 제목은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어떤 개념에는 사람마다 n개의 정의가 있다는 말을 싫어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정의가 통일되지 않은 개념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는데, 개념적 정의가 분명치 않은 단어를 그 정도에 따라 줄 세운다면 아마도 '사랑'이 가장 앞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중문화와 SNS에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한 생리적 거부감이 있다. 말 그대로 몸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각자가 이해하는 사랑의 개념이 천차만별임에도, 이를 조율하려는 노력도 없이 얕은 이해를 삶의 진리인 양 말하는 것을 보면 오글거리거나 답답하거나 알레르기와 같은 반응이 일어난다.
이런 세태 속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두고 일종의 보편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생각했다. 작가는 삶에서 겪는 사랑의 문제를 제시하고 에리히 프롬과 롤랑 바르트를 중심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할 수 있을지 나눴다. 프롬은 성숙한 사랑을 말했고, 바르트는 다소 유아적인 사랑을 말했는데, 이 둘의 교차가 적절하다고 느꼈다.
나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성인(聖人)의 사랑을 이상으로 삼아왔다. 신과 같이 순간적인 감정에 동요하지 않고, 오직 결심으로 베풀고 희생하는 것만이 사랑의 본질이라 믿었다. 그러나 삶의 사건과 인간의 감정, 그리고 신체는 생각보다 불완전한 것이어서 끝도 없는 좌절에 빠지기 일쑤였다.
반면 롤랑 바르트는 의존적이며 프롬의 입장에서 퇴행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격정적인 사랑을 말했다. 연약한 마음을 상대에게 마음껏 기대고, 그로 인해 즐거워하고 울고불고 구르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는 구도(求道)의 길에서 고뇌하던 수행자를 위로했다.
대담이 끝난 후에는 함께 참석한 J와 함께 우리의 경험은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이야기했다. 프롬은 서로의 고유함을, 바르트는 서로의 동화됨을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함께 하는 것인지 물었다.
나는 같은 주파수에 공명하는 유리잔의 비유를 떠올렸다. 내 안엔 셀 수 없는 자아의 조각이 있는데, 그중에는 드러난 부분과 숨어있는 부분이 공존한다. 숨어있는 자아는 나조차도 알지 못한 은밀한 것인데, J가 발산하는 주파수에 공명하며 비로소 그곳에 있음을, 그 또한 나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 선비 같은 내가 신나는 음악에 들썩이고, 실없는 상황극을 즐기게 된 것이 그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사랑에도 본질적이며 보편적인 성질이 존재할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모든 성질 중 찾아내기 가장 어려운 존재인 듯하다. 그렇기에 사랑은 단편적인 경험을 가지고 설교하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맹인이 코끼리를 파악하듯 경험을 나누며 이해를 조율하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묻고 답하는 형식의 북토크가 강의보다 사랑의 성질에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나온 이야기 중 학교에서 사랑을 배우게 하면 좋겠다는 것이 있었는데, 만약 정말 ‘사랑의 이해’라는 과목을 만든다면 사랑에 관한 고전과 경험을 교차하며 나누는 형식으로, 이 책과 북토크의 형식을 본떠 구성하면 좋겠다는 뜬구름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