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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네 Oct 16. 2023

합정동, 집 구하던 날

허허 벌판의 합정역이 떠올라요


높은 건물 하나 없는 허허벌판 같은 합정역. 7번 출구에서 바라본, 처음 가 본 합정이란 곳의 첫인상이 그랬다. 마침 아현동과 합정역의 전셋집 두 건을 놓고 고민하던 터라 2009년 그때의 합정은 믿을 수 없겠지만 큰 건물도 전혀 없고 빌라 위주의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재개발을 앞둔 아현동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합정이란 이름도 숨겨진 동네같이 꽤 낯설었다. 하긴 그 무렵이 홍대에서 상권이 상수로 퍼져가며 상수동이 좀 힙한 느낌이 나기 시작하는 무렵으로 기억하고 있다.


‘엄마 아빠가 없을 때는 네가 엄마 노릇을 해야 한다.’라는 엄마의 말을 내내 들어와서 그랬나. 곧 제대를 앞둔 남동생을, 내가 서울에 오게 된 이상 같이 집을 구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대학을 간 남동생이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걸 보고 엄마가 울었다는 말을 들어서 그랬는지, 상경한 지 3년 차가 된 내가 앞으로 서울 아니면 어디에서 살겠나 싶어 그랬는지 투룸을 구해서 무튼 같이 잘(!) 살아 봐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동생과 내가 주로 오가는 여의도와 신촌, 흑석동을 고려할 때 가능한 예산 범위를 고려해서 여러 동네에 매물을 보러 다녔다, 그것도 혼자서. 영등포, 서대문, 마포 등지였는데 마땅하게 눈에 들어온 게 아현과 합정이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언덕에 있는 아현 매물보다 평지에 있던 합정 매물이 좀 더 베란다가 넓어서 나쁘지 않다고 느꼈고, 또 여의도로 출퇴근하기 그나마 가까운 탓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던 듯하다. 오래되긴 했지만 3층인 집의 큰 방 창가로는 볕도 잘 든다는 전 세입자의 화려한 입담에 혹한 것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볕은 너무 잘 들어서 불편할 정도였지만.


처음으로 전세 대출을 준비하며 (물론 지금도 잘 모르지만) 등기부등본을 보는 법도 잘 몰랐는데 무턱대고 계약금까지 넣은 터였다. 그때부터도 전세난이 심했던지라 부동산에서는 집을 보지도 않고 사람들이 전세가 나오면 무조건 계약금부터 넣는다고 했고, 합정동 일대가 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인기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세입자에게는 무용지물이었지만 상수역에서 만난 부동산 사장님의 차를 타고 갑자기 강변북로를 타고 합정으로 다시 들어가는 신기했던 인상이 좀 신선해서 합정으로 마음이 좀 쏠렸는지도 모르겠다.


근저당이라는 게 얼마 정도 잡혀있는데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부동산 사장님은 말했다. 20대 중반의 신입이었던 나는 회사에서 나보다 열 살 정도는 많은 자가 보유 과장님에게 이게 괜찮은지 물었더니 자기라면 이런 집은 계약을 안 한다는 거다. 그날 저녁, 상수동 거리 어딘가에서 계약서를 작성하러 가기 전에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이사 하던 날, 서울에 온 엄마는 가전제품들을 들여오는 기사님들과 연락을 하느라 바빴고 다음 날엔 막내 이모가 놀러 왔다. 집에 비해 쓸데없이 넓었던, 밖에서 훤히 내부가 내다보이는 유리로 된 베란다를 보며 왜 이런 집을 구했냐는 말에 엄마와 이모가 가고 나서 나는 아마 또 울었던 것 같다.




다행히도 염려가 무색하게 그 집에선 안전에 대한 문제나 걱정없이 10년을 거뜬히 잘 살았다. 낡고 오래된 집이라 탈도 많았지만 - 그러고 보니 들어갈 땐 전 세입자가 잔금 처리를 이삿날보다 일찍 해주지 않는다며 싱크대 수도관까지 파손시키고 가 골치였고, 나갈 땐 세 번째로 바뀐 집 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이사 나가는 날까지 못 준다고 해서 골머리를 앓았었다 - 그래도 동생이 취직도 하고 결혼까지 해서 나갔으니 그 집도 최선을 다해 우리를 품어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2년마다 야금야금 올랐던 전세 보증금은 10년 후에 딱 두 배가 됐다(그러는 2년마다 나는 서러운 자괴감을 주기적으로 느껴야 했다). 그 사이 합정역은 홈플러스와 메세나폴리스, 딜라이트 스퀘어처럼 높고 거대한 건물들의 무등을 탄듯 위상이 높아졌고, ‘합정역 5번 출구’라는 노래까지 배출했다. 경기도 남쪽에 사는 친구는 여기가 말로만 듣던 합정역 5번 출구냐며 신기해하는 모습에 사진까지 찍어줄 뻔했다.



아직도 가끔 합정역을 지나칠 때면 수없이 그 거리를 다녀갔던 많은 날이 떠오른다. 20대의 나도, 할 일 없이 돌아다니던 날도. 합정에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 집도 못 사고 뭐했냐는 누군가의 농담이 비수가 되어 또 한번 자괴감을 느낀 날도. 모든 게 그저 흘러가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변하기만 할 뿐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날 뿐이다. 이제는 자주 가지 못하는 합정역을 생각할 때면 7번 출구에서 바라봤던 넓은 평지 풍경이 뿌옇게 떠오른다. 초창기 컬러 영화처럼 낮은 해상도로. 너랑 나만 아는 촌스러웠던 그날의 첫인상을 기억하는 친구 사이처럼 어딘가 뿌듯하고, 어딘가 아쉽게 두둥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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