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딸이 그림책 작가인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 딸 작품이라면 흥이 잔뜩 올라 이야기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딸은 데뷔작으로 볼로냐 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된 실력가다.
이런 애정은 오래된 에피소드가 있기에 깊이가 남다르다. 딸이 고1 때다. 미대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기엔 늦은 나이였다. 딸의 결심을 듣고 어머니인 친구는 전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수없이 기도했다.
1월에 두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고 알려왔다. 구입해서 보고 느낌글을 카톡으로 공유했다. 한참 시간이 지났다. 친구는 평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문학 동아리 네이버 밴드에 자기 딸 책 출간 소식을 올렸다. 자식에 대한 마음은 자신의 성향도 바뀌놓나 보다. 그제야 친구의 동의를 구하고 느낌글을 댓글로 달아주었다.
그 느낌글을 다듬어 소개한다. 독특한 소재이고, 친구 딸의 작품이기도 해서다. 그림책을 내 나름의 시각으로 쓸 수 있어서도 그렇다. 툭툭 튀어나온 단상들을 조각조각 썼음을 밝힌다.
『과일 할아버지』(진보라)(호랑이꿈)
Ⓒ 호랑이꿈
표지 그림
상대적인 크기를 무시하고 과일 각각의 존재를 고유의 색깔로 드러냈다. 그걸 전부 담고 있는 비현실적 크기의 양손.
과일에 무지개색이 다 들어 있음을 이 그림책을 보고 깨달았다.
출근길
목탄 스케치라고 말하면 맞을까? 연필로 그린 세밀화 기법이 아니라서 이렇게 표현해 봤다.
스케치를 하지 않은 빈 공간과 직선으로 가로등의 빛을 드러냈다. 그게 내 눈에 띄었다.
새벽 다섯 시쯤 물류센터 일을 하고 퇴근할 때다. 순환고속도로 담벼락 너머로 환하게 불을 밝힌 구리 농수산물도매시장을 건너다보곤 했다. 그래서 이 출근길 장면이 내겐 익숙하다.
저긴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자주 궁금증이 일었다. 이 그림책 덕분에 그 세계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 궁금증이 풀렸고.
경매 전 과일상자들
이 장면을 즈음해서 측면 중심으로 과일 색을 입힌 장면이 많이 나온다. 전체를 일일이 색을 입히지 않았는데, 과일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인 것 같다. 그것도 계절별로.
딸기의 붉은색과 주홍색의 복숭아(봄)가 처음 등장한다. 참외의 엷고 짙은 노란색, 그리고 수박(여름)은 크기가 커서인지 강렬한 녹색으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가을의 붉으락푸르락 사과색. 그리고 무지개색의 '파남보'를 고루 지닌 포도색. 특히 포도는 주렁주렁 포도나무에 달린 모습으로 등장한다. 발에 밟혀 으깨진 포도 모습도 연상된다. 옆 페이지엔 귤(겨울)이 묘사가 생략된 가지 밑에 달려들 있고.
시식 장면
할아버지가 시식하는 페이지엔 씹을 때 튀어나간 과일 물조각들이 그려져 있다. 그 조각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물방울처럼 그린 게 아닌가 추측해 보았다.
글에서 정말 마음에 와닿는 표현을 발견했다.
“모든 감각을 열고 과일을 고릅니다.”
경매 장면
처음 보는 응찰기와 그 화면 내용. 경매 품목인 복숭아가 응찰기 뒤쪽에 잔상으로 그려져 있다. 경매 현장답게 숫자들이 공중에 떠다니고 있고.
가게 장면
과일 할아버지의 가게 '대부유통'(78호)은 실제 상호명일까 문득 궁금했다. 그렇다고 친구가 답변했다.
여기에선 할아버지가 무사히 경매를 마치고 과일을 전시해 놓고 계신다. 할아버지 마음의 안정감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입가엔 미소가 보일락 말락, 과일 위에는 과일 물조각들이 크고 또렷하게 그려져 있다고 상상해 봤다.
가게들 장면 글에선 ‘과일을 빌리다’라는 생소한 표현을 접했다. 작가가 현지답사에서 발견해 책에 담은 낯설고 귀한 표현.
가게와 손님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과일색은 옅어지고 두루뭉술해진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일상 모습이 이어진다. 과일 할아버지가 주인공이니까.
표지 그림과 동일한 할아버지 양손 ‘과일 모둠’ 장면에서 이런 글로 마무리하고 있고.
“오늘도 할아버지는 두 손 가득 향기로운 과일을 담았습니다.”
그림과 매치되고, 끝맺음 문장으로 적합하다.
마지막 양쪽 페이지
대부유통 가게 내부 모습. 세밀한 흑백 스케치와 과일 하나 홍일점. 할아버지 퇴근 때의 모습이랄까.
독특한 소재를 개성 강한 그림으로 소화해낸 좋은 작품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진보라 작가의 그림과 글쓰기 여정 쭉 이어지기를……
덧붙이는 글) 과일 할아버지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