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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진 Aug 12. 2024

뜨거운 퇴사

  12월 23일 금요일 오전, 연말 송년회 행사로 회사 근처에 있는 파티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버스나 택시를 타기는 거리가 애매해 걸어서 이동하고 있었다. 일이 마무리가 덜된 팀은 남겨두고 예닐곱 명의 사람이 거리를 걷는 중에 매서운 바람이 들이닥쳤다. 12월 한겨울의 차디찬 바람은 날카롭기 그지없었기에 단단히 껴입어도 귀 끝이 꽁꽁 얼어붙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직장동료 여럿과 함께 갖은 호들갑을 떨며 걸어가니 처연하기보다는 재밌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한파를 뚫고 십 분 정도의 거리를 걸어온 파티룸 역시 냉랭했지만 넓고 깔끔했다. 한편에는 커다란 냉장고와 주방 시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쿠킹클래스로 많이 활용하는 장소로 보였다. 다들 한껏 싸매고 온 롱패딩과 목도리 등 각종 방한 장비를 옷걸이에 잘 걸어두었고 이내 각자의 일을 찾아서 하기 시작했다. 각종 음료와 핑거푸드를 준비하는 사람들, 빔프로젝트와 스피커를 연결하는 사람들, 인원에 맞춰 책상과 의자를 세팅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행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 중에 어느 하나 뺀질거리는 사람이 없다는 게 참 신기한 조직이었다. 그렇다고 사업이 다 잘되던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건 모두가 열심을 냈던 태도 덕분에 조직 분위기는 대체로 긍정적일 수 있었다. 그런 회사의 송년회 날이자 내 6년간의 회사 생활 중 마지막 출근날이었다.


 팀별 연말 보고와 힘들지만 의미 있었던 경험, 기분 좋았던 순간 등을 공유하고 개별 발표 시간이 되었다.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담담히 준비했던 멘트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말들을 했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체로 상황이 여러모로 아쉽게 되어 퇴사한다는 뉘앙스였다. 참 좋은 조직과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건넬 때쯤 한두 명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구성원이 여초다 보니 눈물이 더 빠르게 전염되었다. 그 와중에 나는 무뚝뚝하던 대표님이 눈물을 글썽이시던 게 참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앞선 말처럼 나는 여러모로 상황이 아쉬웠고 이미 그 문제들을 해결하며 감정이 메마른 상태였기에 눈물이 차오를 일은 없었다. 대신에 많은 직장 동료들이 나의 퇴사에 눈물을 흘려주었다. 눈물 속에서 내가 준비한 깜짝선물과 손 글씨로 쓴 엽서들을 건네자 그럭저럭 침울하지 않게 내 발표 시간이자 퇴사 인사가 잘 마무리 지어졌다. 사실 조직에서 퇴사한다고 유난 떠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조직에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게 얼마나 비일비재하고 당연한 일이던가. 그렇게 모든 사람의 오고 감에 감정과 힘을 많이 쏟는 것은 조직 차원에서도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송년회가 겹쳤었고 나름 오래된 직원이었고 주요한 팀들을 옮겨 다니며 많은 사람들과 협업했고 그렇게 애써 일한 시간과 마음의 교집합들 덕분에 유난스러운 퇴사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이후에는 총무 담당 직원분의 섬세한 기지로 중국과 베트남과 이탈리아 등 각지에서 온 배달 음식을 먹으며 자유롭게 담소를 나눴다. 조금씩 맥주를 곁들이기 시작했고 이어진 막내 직원들이 진행하는 레크리에이션에 목이 쉴 정도로 즐기며 참여했다. 외부 일정으로 뒤늦게 참여하신 동료가 맛있는 와인을 사 와 흥에 겨워 와인도 함께 들이키기 시작했다. 분위기도 취기도 무르익으니 송년회 장소가 열기로 가득했다. 어느덧 웃고 떠들다 보니 모든 일정을 마치는 시간이 되었다. 정리를 위해 조명을 켜고 보자 다들 얼굴은 불그스레하고 목은 쉬어있었다. 그렇게 단체 사진을 남겼고 취기를 안은 채 또 그렇게 싹싹하게 뒷정리하기 시작했다. 분리수거를 하는 사람들, 빔프로젝트와 스피커를 정리하는 사람들, 의자와 책상을 원상 복구하는 사람들, 분실물을 찾아주는 사람들. 그렇게 눈 깜짝할 새 뒷정리를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오자 다시 지독한 한파에 다들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럼에도 조금 더 따뜻해진 마음으로 여럿과 악수와 포옹을 나눴다. 취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하나 더 쌓인 추억들 덕분이었을까. 지독하게도 추웠던 겨울날이었지만 내겐 뜨거운 퇴사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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