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시작할 때 첫 마음은 스트레스에 짓눌리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하던 일은 회의가 많은 직무였고, 안 그래도 생각이 많았던 나로서는 오래 앉아서 일할수록 생각의 무게에 점점 더 눌려갔다. 입사 1년 차, 어떻게 하면 일을 현명하게 할 수 있는지 요령이 턱없이 부족했고 밥 먹듯이 야근을 했고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자 크고 작은 병이 늘어갔다. 몸을 단련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 어떤 운동을 언제 시작해야 할지도 막연했다. 그저 회사에서 버티다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를 반복하다 정말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무작정 집에서 가까운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을 크게 끼고 달리는 사람들이 보였고 대단한 준비물도 요령도 필요 없을 것 같아 달리기를 시작했다. 다른 운동을 찾아보는 부담을 더하고 싶지 않아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달리기를 선택했다.
처음에는 달린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었다. 걷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바람을 느끼는 자체가 좋았다. 비록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래도 집에 누워서 간신히 휴대폰만 붙들고 누워있을 때보다 훨씬 생기를 느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2~3일에 한 번은 나가서 달렸다. 어떤 날은 야근을 하고 10시쯤 집에 돌아와 머릿속에 가득 찬 잡념을 떨쳐버리고 싶어 달리러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한두 달이 지나고 반년이 다 되어갈 즈음엔 30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됐다. 컨디션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어느 날은 30분을 달리고도 체력이 충분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잘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오래 달릴까?”, “조금 더 빨리 뛸까?”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였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달릴 수 있을까? 달리기 전에 그리고 끝난 후에 어떤 스트레칭을 해야 더 도움이 될까? 시간을 기준으로 할까, 거리를 기준으로 할까, 아니면 속도를 기준으로 훈련해야 할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자연스럽게 달리기에 관한 책과 영상들을 찾아보게 됐다.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글이나 강의로만 봐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 모임에 가입했다. 전문가의 지도를 받으며 운동을 시작했고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물어보며 나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매체나 강사가 말하는 훈련법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 공통된 의견이 있었다. 바로 '시간'이었다.
예를 들어, 10km를 달리려 한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 거리를 목표로 훈련하는 게 아니다. 시간을 기준으로 5km를 35분 정도에 뛴다고 가정하면, 거리나 속도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시간을 두배로 늘려 1시간을 달리는 것이다.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훨씬 느린 페이스로 달려야 한다. 호흡을 고르고 근육과 인대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달리다 보면 어느새 40분, 50분을 넘기게 되고, 결국 1시간을 달리는 것도 가능해진다. 1시간을 꾸준히 달릴 수 있게 되면, 이제 그 시간을 유지하며 거듭 훈련한다. 점차 내 호흡은 리듬을 찾아가고 근육과 인대가 점진적으로 강해지면 어느 순간 1시간 안에 10km를 달리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게 된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10km를 목표로 달리기를 시작했다면, 아마 중간에 지쳐버려 달리기를 취미로 삼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저 가볍게 달리는 걸 즐기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기초가 다져지자 '좀 더 잘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생겼다. 그리고 시간을 늘리며 훈련하는 방식을 선택한 덕분에 실력을 향상될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은 달리기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운동이 되었다. 처음에는 일에서 받는 압박을 견디고 살아남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어떻게 내가 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을지도 깨닫게 되었다. 그 방법 역시 '시간'이다.
속도라는 효율도, 방법이라는 효과도 모두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그 부분에 집중해서 일을 풀어나가려다 보면 적절한 요령도 내 패턴도 찾지 못해 곤란을 겪기 쉽다. 시작할 때는 그저 우직하게 기본에 충실하고, 시간을 꾸준히 쌓아가는 것이 먼저다. 중간에 이런저런 시도를 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 시도가 큰 성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다. 묵묵히 기본을 지키며 시간을 쌓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커다란 성장곡선을 그리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가 되면 다양한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어려운 일도 차분히 해나갈 수 있는 담대함이 생긴다. 달리기로 치면 같은 시간을 들여도 속도가 빨라지고 거리가 늘어나는 것과 같다. 결국, 시간만큼 정직하게 훈련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은 없다.
내 인생의 치트키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망상을 펼쳐본다. Show me the money를 외치면 통장에 1억씩 들어오기를, Black sheep the wall을 외치면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를 바라보지만 단연코 그럴 일은 없다. 내 인생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란다면 왕도는 없다. 100억 자산가가 되고 싶다면 먼저 오늘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고,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책상에 앉아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한다. 방법을 논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잘하는 건 그다음 문제다. 버티는 것도 그다음 일이다. 성공은 아예 다른 영역에 있다. 결국 중요한 건 트랙에 먼저 올라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쌓아가며 점차 더 멀리, 더 빨리 달려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