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돌보며 지낸 기간은 확실히 불안도 우울도 적었다. 하지만 무직의 기간이 길어지고 주변상황이 악화되며 점차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다. 퇴사하고 1년 10개월, 여즉 부모님 집에 살고,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올해 퇴직 하셔 모두 무직 상황, 할머니의 노환이 어머니에게 미치는 우울, 어느새 건강한 루틴을 놓치고 나태하게 사는 내 마음의 상태가 좋기는 어렵다. 흔한 가족 영화 속에서 무책임하게 그려지는 철부지 삼촌의 모습이 어느새 나와 겹쳐 보인다.
여태의 궂은 날씨에도 무난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음은 부모라는 지붕이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아닌 밤중에 지붕이 흔들리고 구멍이 숭숭 뚫리자 내가 지붕 밑에서 안전하게, 아니 안일하게 지내왔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서른이면 이립(而立)으로서 인격적, 사회적 독립을 하는 나이라고 공자는 말했다. 예수님도 서른 즈음 세상에 나와 십자가 사랑을 전했다. 서른넷의 나는 세상으로부터 더 움츠러들었다. 부모님 집에서 나와 살아야겠다 하다가도 비어 가는 통장을 보니 괜히 더 움츠러들게 된다.
그러니 요새는 우울한 마음을 감출 길 없다. 비극적으로 우울은 무기력과 손을 잡고 온다. 그러니 알면서 하지 않는 것들이 늘어간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규칙적으로 운동하기. 건강하고 담백하게 식사하기.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공부하기. 꾸준히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일자리를 구하기...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작지만 기본적인 일들을 자꾸 외면한다. 크고 작은 과업이 부담스러워 사람 사이로, 책 사이로, 매체 사이로 숨어든다. 피하고 숨다 보니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 일이 어색해진다. 친구와도 엄마와도 심지어 거울 속 나에게도.
무엇으로부터 피하는지도 모르고 꽁지가 빠져라 숨다가 주변이 좀 조용해지자 머쓱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지만 아무것도 없다. 나를 파괴하려 달려드는 그 어느 것도 없다. 똑딱똑딱 초침소리 위로 내 마음의 소리가 얹힌다. "서른넷이면 1억은 넘게 모았어야지. 돈을 다 탕진하는 게 말이 되냐", "아직 차도 없어?", "너 친구들은 좋은 직장 가서 팀장도하고 아니면 사업해서 잘 버는데 여즉 뭐 하고 있냐.", "맨날 그렇게 나태하게 누워있으니깐 네가 이 모양 이 꼴이지"와 같은... 내 마음의 소리가 스스로를 끝없이 닦달한다. 돈으로 시간으로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
1인분에 대해 생각한다. 돼지고기 150g, 일본식 가지덮밥의 정량 이런 것 말고, 세상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1인분에 대해서. 내가 해내야 할 1인분. 내가 살아내야 할 1인분은 어느 정도 일까. 문득 초밥장인이 대중없이 밥알을 쥐는 것 같지만 매번 정확한 양을 집어내는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내 하루의 일분일초를 하나하나 해체해서 분해해봐도 나의 1인분이 어느 정도인지 도통 모르겠다. 주변 친구들을 떠올려보면 다들 제 몫 이상으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움 될 것 하나 없는 비교로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어본다. 아니 근데 잘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이 1인분 이상을 하고 있으니 당분간 나는 좀 덜해도 되는 것 아닌가 싶다.
허나 자기 연민은 여기까지다. 내가 쓴 글이지만 이 글이 곧 나는 아니다. 오늘을 벗어던진 허물이다. 오늘의 내 불안함, 나태함, 추악함, 게으름을 본다. 그냥 본다. 오늘의 나는 그랬구나. 내일은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오늘의 모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니 허물은 그냥 두고 내일 새 옷을 입을 마음의 준비를 해본다. 따뜻한 물로 천천히 샤워한 후에 향긋한 바디로션을 꼼꼼히 발라줘야겠다. 자기 전 차분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어야겠다. 그렇게 천천히 포근하게 잠에 들어야겠다. 내일은 좀 더 말끔한 옷을 입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