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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나지행 Nov 08. 2019

#6.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만들겠다

글로벌 떠돌이의 시작...


공을 들였던 내 콘텐츠는 이제 공중분해되고 없다. 하지만...

회사를 살리겠다


회사의 수익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디자인 회사와 조인해서 디자인, 마케팅 시스템을 도입해 외주를 주는 방식을 만들었다. 디자인 쪽은 어느 가게나 회사가 설립될 때 항상 필요한 부분이니까... 

마케팅 시스템에 도움이 될까 싶어 기자로서 기사도 썼다.

어떤 발버둥으로도 그 수익에 모든 걸 충당하기는 택도 없었다. 그때 당시는 뭐든 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회사를 살릴 수 있는 일이라면...

하지만 점점 지쳐갔고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는 심정으로 쫓기는듯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불안한 심리상태였으므로 누군가 의지하고 싶어 만났던 남자 친구들과도 늘 오래갈 수 없었다.


그래.. 나는 혼자다! 하지만 무언가는 다시 만들어 보리라...


해외로...



마침 해외 프로모션껀으로 제의가 들어왔다. 이미 프로모션으로 해외를 많이 돌아다녀봐서 두려움은 전혀 없었기에 오래 끌 필요도 없었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일주일간의 일정을 잡고 출국을 했다.

그 지인은 한국에, 나는 외국에 머물면서 지속적으로 소통했고, 그러나 현지에서 로컬 외국인들과 소통을 하면 할수록  지인이 말했던 그림과는 달랐고 그 문제점들을 지적하면 할수록 이미 외국에 나가 있는 나를 생각은 하는 건지... 그 지인은 연락을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아... 내가 판단 실수했구나...'

너무나 믿음직스럽게 말하던 그 지인도 사실은 경제적인 컨디션이 매우 안 좋은 상황이었다는 것은 후에 눈치를 채게 되었지만, 한국에 있을 때의 삽질과 마찬가지로 이미 그때는 늦은 때였다


해외에 장기체류할 당시 첫 머물렀던 아파트.마음이 불안해서 정리란 없었다...



돌아가는 리턴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결심하다

싱가포르 전경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 내가 외국에서 현지 파트너를 찾겠노라고 발 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 나의 모험에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호텔살이를 하면서 수시로 이사를 다녀야 했고, 재미있는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워너뮤직 싱가포르의 대표 사이먼과 콘서트 관련 마케팅 사업을 하던 리차드 (좌)  집앞 바에서 가끔 외국인 친구들과 불금을...매우 유쾌하고 좋은 사람들 (우)


고생 끝에 교육사업을 하고 있던 한 현지 파트너를 만났는데 나를 참 많이 챙겨주기도 했지만 일을 하면서 싸움도 정말 많이 한 것 같다. 문화의 차이를 그때 많이 느꼈다.

"너는 왜 네가 우리나라에 왔으면서 너희 문화를 자꾸 얘기를 해?"

그 파트너가 늘 내게 한 말이다. 서로의 나라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그 친구와 함께한 한류 사업은 결국 그 친구도 막대한 손실을 봤고 나 역시 돈을 벌어들이지는 못했다. 그 나라는 싱가포르였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집 렌트 비하며 물가가 무지 비싸다.


일을 진행하는 동안 너무나 많이 고생했고 아팠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얻은 것도 있다.



시야가 참 많이 넓어졌다.


싱가포르 아트스쿨 SOTA, 이곳은 다양한 공연과 볼거리가 열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 외국인들과 사업을 시작할 때 서로의 생각 차이 때문에 잘 진행되다가 엎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고 현재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서로의 문화 차이에 대한 양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로벌 비즈니스로써 해외지사를 구축한 기업 이외에는 되려다가도 무산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하게 되는 이유인듯하다.


그곳에서 힘들었던 사업과는 별개로 나와 성격이 비슷한 한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나이로 따지면 나보다 언니이다. 이벤트 컴퍼니에서 일을 하던 친구여서 음악, 공연 쪽의 일에 관심이 참 많았다. 당시 그 친구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예술의 전당 같은 예술학교 내에서 남편과 카페를 운영했다. 그녀가 경영을 했고 남편은 파티시에로서 케이크를 만들었다. 남편이 일본에서 유학을 했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 문화에 관심이 굉장히 많았고, 경영하던 카페는 일본문화의 느낌이 많이 나던 곳이었다. 모든 것들이 아기자기하고 정갈했다.

"지금 싱가포르는 한류를 너무 좋아해. 너의 콘텐츠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많을 거야. 방법을 한번 강구해보자" 

하며 나를 많은 곳에 데려갔고, 많은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kki sweet의 대표인 델핀 언니와 그의 파티시에 남편 


팀버 그룹에서 운영하는 라이브 레스토랑. 델핀 언니는 늘 라이브 공연이 있는 바나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공연을 만들 수 있는 곳을 소개해주었다.


혹시나 내가 밥을 굶을까 가족들과의 식사에도 꼭 나를 불러주었다. 계산을 하려고 하면 "우리 가족 식사하는데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거야. 넌 손님이잖아 괜찮아"라고 늘 말해주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참 재밌는 건 그 가족들이 밥을 먹을 때 내가 끼면 남편은 딸 섀넌에게 밥을 먹이고 있고, 델핀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나와 비즈니스 계획 이야기를 했다. 항상 무언가 아내와 남편이 바뀐 느낌이었다.

가정사에 대해 참견을 하면 실례가 될까 입을 닫고 있던 어느 날 너무 궁금해서 그 부분을 웃으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델핀 언니는 내게 말했다. 

"너희 한국은 아내가 집에서 밥을 하지?

우리는 여자가 밥을 안 해. 살림도 안 해. 그냥 동등할 뿐이야. 너도 싱가포르 남자와 결혼해라 하하하"

그녀는 항상 대차고 그릇이 큰 여성이었다.


팀버그룹에서 주최한 싱가포르 요식업에 대한 강연 (좌) 그들에게 싱가포르 외식사업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말을 하고있는 델핀 (우)


아시아 금융의 중심. 싱가포르는 금융, 무역외에 매일 외식을 하는 가정들이 많다 보니 외식사업이 잠재력이 꽤 좋다고 그녀가 흐름을 읽으라며 나를 데려간 곳이 있는데 그곳은 팀버 그룹(이미 싱가포르에서는 외식산업계의 1위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기업)에서 개최한 싱가포르 외식산업의 동향과 같은 강연이었다. 몇 명의 성공한 큰 사업가들과 장관이 참여한 행사였다.


그들의 스피치가 끝나고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팀버 그룹의의 대표에게 

"우리 만난 적 있는 거 기억하죠? 지금 내가 경영하고 있는 카페에 오셨잖아요? 나는 싱가포르 외식사업이 이 부분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의 개선을 위해 우리 같은 경영인들은 이 부분을 지원을 받고 싶은데요"

라면서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는데 그 행사가 끝나고 팀버 그룹 대표는 그녀에게 다가와서 싱가포르에서의 외식산업에 대해 잠시 얘기를 하였다. 

그런데... 그와 얘기가 끝난 후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른다...


우리는 밤에 라이브 바에 가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했다.

"아까 왜 울었어?"

그녀는 자신의 사업계획서를 보여주며 지친 듯 말했다.

델핀 언니의 kki sweet 


"너도 알지? Kki(그녀의 매장 이름)는 내가 경영을 해야 돼. 매출이 나쁘지 않지만 너도 알다시피 싱가포르는 물가가 비싸. 이미 대출을 받아 시작한 거여서 이자는 계속 나가고 있고... 그런데 내게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거든. 케이크 팩토리야, 아카데미 시스템도 있는... 이것은 싱가포르에 아직 없어. 하지만 정말 좋은 사업 아이템이라고 확신해. 이것을 만들기 위한 투자를 알아보고 있어...

남편은 파티시에로서는 뛰어난 아티스트야. 

아티스트란 말이지. 경영을 내가 해야 돼. 내가 외조를 잘해야 그도 빛을 발할 수 있고, 사업도 성공시킬 수 있어. 그런데 너무 외롭고 지쳐.."


아기자기한 kki의 케이크


눈물을 한 방울 다시금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당시 나는

 '언니는 나처럼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 가족들이 옆에서 함께해주니까 그래도 나보다 낫잖아. 덜 외롭고...'라고 말했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를 잠시 회상을 해보면 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짐이 그때 혼자 개척을 하겠다며 외딴곳에서 모험을 하고 있던 나보다 더 무거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돌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애들의 미래가 달려있는데 앞으로 전진하지 못했던 당시 내 어깨에 짊어진 짐이 1분 1초가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시작을 위한 후퇴. 옆 나라로 간다

싱가포르에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 태닝


전 로컬 파트너와 비즈니스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워크퍼밋은 사라졌다. 관광비자로 모험을 하기란 더 불안정한 요소가 추가된 것과 다름없었다. 거기에 더하여 여윳돈은 점점 바닥이 났고, 싱가포르에서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마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한 다리 걸쳐 알게 된 한 한국인 언니가 말레이시아로 건너오라는 말을 했다. 자신의 집에서 일단 머물라는 말을 덧붙이며...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 잠시 머뭇했지만... 그녀는 반복적으로 오라는 말을 내게 했었기에


'그래... 이젠 내가 언제나 추구하던 가오다시란 없다. 무엇인가를 만들기 전까진 쪽팔림은 잠시 접어두자.'

그렇게 나는 1년 넘게 지냈던 싱가포르를 떠나 후퇴를 한다. 말레이시아로...


어느 나라로 이동하든 신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라는 믿음만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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