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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다 Oct 23. 2020

기억하고 싶어서, 지금 아빠의 모습을

커가는 동안 나는 아빠를 어디쯤 두었던 걸까

아빠와 둘이서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열흘에 가까운 짧지 않은 여정을 준비하며 들떠있는 아빠를 보면서 나는 마냥 신이 날 수 없었다. 사실 걱정이 가득했다.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과 항암 치료를 마친 뒤로는 몸이 고되면 안 되는데 이 여행이 혹여라도 아빠에게 무리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빠가 장거리 비행은 처음이라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은 괜찮을지, 음식은 입에 맞을지, 시차 적응은 잘할지, 계속 걸어야 하는 일정이 괜찮을지, 모든 것들이 신경 쓰였고 걱정이었다. 떠나기 전 엄마는 아빠를 잘 보살피라고 여러 번 당부를 했다. 차라리 혼자 다녀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얼핏 했고 그저 무탈히 다녀오기만을 바랐다.


아빠는 내 근심스러운 속도 모르고 마냥 신이 나 보였다. 꽉 채운 60이 되어서야 먹어보는 두 번의 기내식을 싹싹 비웠고 비행기에서 와인도 마시고 불편한 좌석에서 잠도 잘 잤다. 그런 아빠를 보며 그래, 즐겁게만 다녀오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하지만 도착해서도 나는 잔뜩 예민했다. 옷을 왜 얇게 입으려고 하냐며, 왜 야채를 먹지 않냐며, 뷔페에서는 왜 몸에 좋지 않은 것을 가져왔냐며, 와인을 왜 자꾸 입에 대려고 하냐며 아빠에게 날 선 잔소리를 해댔다. 내 끊임없는 잔소리에도 아빠는 못마땅한 기색도 없이 껄껄 웃기만 했다. 그렇게 좋은지. 아빠는 여행 내내 활기찼다. 아빠는 씩씩하게 앞장서서 걸었고 많이 웃었다. 마치 많이 먹어 본 음식처럼 가리는 것도 없이 현지식을 잘 먹었고, 여섯 시간의 시차에도 밤마다 제집처럼 잠도 푹 잘 잤다. 사실 그곳에서 내 걱정은 필요치 않았다. 아빠는 나보다도 여행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시차 때문인지 아빠의 코골이 때문인지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옆에서 곤히 잠든 아빠의 모습을 보며 문득 지금의 이 광경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아빠의 잠든 모습을 이렇게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하다가 아빠에 대한 기억이 어디까지 있는 걸까 떠올려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내게 또렷한 아빠의 모습이 어디부터인지만 기억해냈다. 기억한다고 하기엔 오래지 않은 날.


아빠와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아빠가 암 선고를 받고 난 뒤에 병원에 보호자로 동행하면서부터였다. 격주로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야 했는데 병원에 가는 날짜를 체크하며 자주 통화를 했고, 같이 병원을 오가며 우리는 둘이서 차를 타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아빠가 아프니까 이렇게 둘이 데이트를 할 시간이 생겼다고 병치레의 좋은 점을 찾아내며 애써 웃어야 했던 때였다. 잠들어있는 아빠의 모습이, 이틀간 항암 주사를 맞고 일주일을 내리 맥없이 고꾸라져있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내가 커가는 동안 나는 아빠를 어디쯤 두었던 걸까. 한동안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느낌이었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마치 있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어린 시절의 아빠, 그 이후로 아빠는 어디에 있던 걸까. 아빠가 아프기 전의 모습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의 부재는 지금 우리가 함께하는 온전한 밤낮이, 함께 걷는 길이, 함께 지낸 그 숙소의 공기가, 어쩐지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고 마주 보고 서로의 사진을 찍었고 나란히 앉아 눈을 감고 기도를 했고 같이 비를 맞았고 쏟아지는 비를 피해 처마 밑에서 따뜻한 커피를 나눠 마셨다. 그러는 동안 잊고 있던 익숙함이 떠올랐고 나는 안도했다.


매일 아침 길을 나서기 전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뭘 그렇게 맨날 찍냐며 툴툴거리면서도 셔터를 누를 때면 내 어깨를 꽉 감싸고 입 꼬리를 크게 올려 씨익, 웃는 아빠의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기억하고 싶어서. 지금 아빠의 모습을. 우리가 함께 있는 지금을.


여행의 끝 무렵엔 아빠의 코 고는 소리에도 깊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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