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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다 Sep 19. 2020

흘려보낸 엄마의 마음들

엄마가 잊은 것들과 잃은 것들

보리차가 상했다. 차에 두고는 며칠 동안 열어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옆자리에 탄 엄마가 물 좀 마시겠다고 열어 한 모금을 마신 뒤에 말했다. "이거 상했는데? 보리차는 잘 상해.”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혈압이 높아서 6개월마다 정기검진을 하고 약을 타 오는데 하필 그날, 상한 것을 알았다. 날이 더우니 입이 닿았던 보리차가 상했을 뿐인데 그날따라 상한 보리차가 마음에 걸렸다.


엄마의 몸이 조금씩 상하고 있다. 혈압도 높고 눈이 시려서 눈물도 자꾸 나고, 기침이 나기 시작하면 잘 멈추질 않고, 손목도 아프고 무릎 관절도 좋지 않아서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들어한다. 어느 날엔 귀가 조금 불편하다고 해서 병원에 가보니 귀에 난 혹이 점점 자라고 있다고 했다. 이제 하다하다 귀까지 아프냐고,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료 예약일을 기억하고 병원에 모시고 가거나, 관절에 좋다는 영양제를 주문해 주거나, 손목이 아프면 침을 맞으라고 잔소리를 하는 정도로 챙기면 될 줄 알았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족들과 식사를 하려고 하는 편이라 그날도 엄마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아빠가 약속이 있다고 나갔다며 심통이 나 있었다. 빨리 와, 우리끼리 진짜 맛있는 거 먹자. 엄마의 말에 서둘러 갔다. 집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술도 한잔했다. 엄마는 그날따라 술을 많이 마셨는데,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 말리지 않았다.


처음엔 아빠 흉을 한참이나 봤다. 엄마가 주말을 얼마나 기다리는데, 아빠와 근교로 드라이브를 나가서 커피 한 잔을 하는 것이 낙인데, 아빠가 자꾸 다른 약속을 잡는 게 서운했던 것이다. 다음엔 언니였다. 옆 동에 살아도 엄마가 좋아하는 사우나 한 번을 같이 안 가준다고, 결혼하면 자식 다 소용없다고. 혼자서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옛날엔 시집 읽는 것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모르겠다고. 아빠와 언니 흉을 보기 위해 기껏 찾은 상대가 나였다. 내가 제일 바쁘다며 고작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집에 들르는 나에게, 막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엄마.


엄마는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했다. 책을 꺼내는 법조차 잊는다는 느낌은 어떤 것일지 생각했다. 엄마가 잊은 것들과 잃은 것들, 굳게 감춰온 그 공허함을 생각하니 가슴이 시렸다. 내가 알아채지 못한 채 흘려보낸 엄마의 마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했다. 뒤늦게 자리한 아빠에게, 엄마한테 잘 좀 해요. 주말에 약속 좀 잡지 말고요. 주말엔 엄마랑 놀아야지,라는 말들로 괜히 더 큰소리로 아빠에게 핀잔을 줬다. 젊었던 엄마가 식탁에 앉아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시집을 읽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흰머리가 훨씬 더 많은 엄마의 머리칼이 유난히 희게 보였다. 맞아, 엄마는 책을 참 좋아했었지.


며칠 뒤에 시집 두 권과 에세이 두 권을 골라 엄마에게 보냈다. 엄마에게 메시지가 왔다.


- 엄마가 쓸데없는 소리 해서 맘 쓰게 했네. 미안하고 고맙고. 항상 사랑한다.

- 내가 미안해요.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나도 사랑해요.


미안하고 미안한 마음과 고맙고 고마운 마음이 오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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