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진보, 희망의 또 다른 이름

by 밤과 꿈

대선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각 정당마다 기존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한편으로 새로운 표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진보 정당이라는 더불어민주당도 외연을 넓혀 중도보수의 표를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을 정책 정당으로서 온전한 진보 정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더불어민주당은 자유당 시절의 민주당과 뒤를 이은 신민당의 대를 이은 보수 정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후 86 운동권이 제도권 정치에 진출하면서 진보의 색채가 짙어져 지금에 이른 것이 더불어민주당인 것이다. 그러나 86 운동권이 진보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었는지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원래 보수와 진보는 자본주의의 탄생과 함께 탄생한 가치이자 정치 이념이다. 산업화는 시민계층, 주로 귀족이라는 계층을 대신해 주류 계층으로 부상하는 자본가, 혹은 부르주아라는 계층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자본을 확대 재생산하는 과정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데 구시대의 신분 제약에서 탈피,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누구든지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자유'라는 보수의 가치가 여기서 나왔다. 부의 확대 재생산은 주로 노동력의 착취와 지대 수익의 창출이라는 방법으로 이루어져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했고 이는 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입장에서 '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가 생겨났다. 이것이 진보의 가치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가 뒤늦게 산업화에 주력한 1970년대는 계층의 분화가 일어나면서 사회적 갈등이 첨예하게 일어나던 때, 정부의 비호 아래 재벌이 생겨나고 산업 역군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구로공단 등에서 값싼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노동자가 양산되었었다. 이때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던 운동권에서는 학생운동의 연장으로서 노동운동을 당연시하게 되었고 이는 1980년대 초까지는 정석처럼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권에 변화가 일어난다. 운동권 내에서 헤게모니 논쟁이 있었고 6.29의 승리를 기회로 운동권은 정치세력화하게 된다. 이는 선배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던 학생운동이 동기의 순수성을 잃고 쇠퇴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나는 이들 86 운동권을 선배 세대의 운동권과는 분리하여 생각한다. 순수성도 그렇지만 그 지향하는 바에서 차이가 있다. 길게 언급할 여력이 없지만 지나치게 정치 지향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여전히 우리의 노동 현실이 평등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미 정치세력화된 귀족 노조가 노동운동을 좌지우지하고 사회문제가 다변화된 지금에 있어 노동문제가 진보의 유일한 지향점은 아닐 것이다.


나도 대학 시절에 운동권에 몸을 담고 있었다. 비록 운동권의 편향된 자기 확신에 회의가 들어 거리가 생겼지만, 그것보다는 역사에 대한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을 스스로 넘어서지 못해 운동의 정석을 따르지 못했다. 나는 역사적 존재로서 개인은 역사의 동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움직이는 에너지에 자신을 더할 때 역사는 발전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한 사유의 끝이지만 민주화라든지 노동해방과 같은 가시적인 목적이 없는 결론을 내가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운동권과 멀어지면서 오랜 시간을 자신의 비겁을 자책하면서 살았다.

뒤늦게 과거의 내 생각이 스스로를 에너지, 즉 물질로 파악한 유물론적 사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을 물질로 파악한 것은 내 전공이 물리학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었겠지만,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은 형해화될 수밖에 없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뒤늦게 도달한 또 다른 결론으로 오랜 시간 내 정신을 지배했던 비겁을 극복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가졌던 유물론적 사관이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초에 자본론과 같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접할 수는 없었다. 소외론을 공부하면서 마르크스의 평전을 접했을 따름이다. 내가 가졌던 유물론적 사관은 내 사유의 결론이다.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큰 관심도 없다. 지금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 까닭은 자본의 형성과 성격에 관심이 있어서이다.

그래도 마르크스를 존경한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고민하면서 살았던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자신이 가진 이상의 실체를 좇아 구체화하면서 한때나마 인류에게 희망을 주었던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현실이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상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다변화된 진보의 가치가 노동 문제, 젠더 문제, 빈부의 격차에 의한 계층의 분화 및 고착화 등 사회적 갈등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겠지만, 이를 함께 포함하여 사회에 현실적, 심리적 불평등이 해소되리라는 이상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보다. 나 또한 그와 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상주의자이기에 여전히 진보에 속한다고 믿는다.

궁극적인 희망을 꿈꾸는 진정한 진보를 찾아볼 수 없는 이번 대선을 경험하면서 희망이라는 진보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 세상을 혼자 하는 속앓이로 그려본다.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12화이미 기울어진 대선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