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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이로운 Aug 24. 2020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여인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예술인을 꼽는다면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예로 들 수 있다. 신사임당이 화가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테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허난설헌은 시인이다.


수십 년의 시간 차는 존재하지만 두 여인 모두 16세기에 태어났다는 점, 그리고 당대 이름을 널리 알린 학자를 가족으로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특히 모두가 알다시피 신사임당은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의 어머니다. 허난설헌은 학자이면서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집필한 문인, 허균의 누이이다. 일반 백성에겐 교육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던 조선 사회, 한 집안에서 예술가와 학자가 동시에 나왔다는 것은 두 여인 모두 명망 높은 집안의 규수였다는 걸 의미한다.      


허나, 아무리 양반가라 한들 딸에게는 별다른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게 당시의 사회 분위기. 기껏해야 한글을 배우고, 신부수업을 받는 게 여성이 누릴 수 있는 배움의 전부였는데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조선 중기의 문신)은 아들과 딸을 나란히 앉혀놓고 차별 없이 가르쳤다고 한다. 신사임당 역시 학식이 뛰어난 어머니로부터 글과 학문을 배웠다고 하니 당시로써는 굉장히 개방적이고, 선진적인 집안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은 여러모로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혼인을 기점으로 두 여인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신사임당은 19살 때 아버지가 정해준 남자와 혼인을 하는데 소위, 금수저 출신인 신사임당에 비해 남편 될 사람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하지도 않았고 형편도 넉넉지 않았다고 한다. 딸을 풍족하고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고 싶은 게 세상 모든 아버지의 마음이거늘 왜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남자와 결혼시킨 걸까?     


사임당의 아버지는 일찍이 딸이 가진 예술성과 천재성을 알고 있었고, 재능을 키우는데 필요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여자가 성공하기 어려운 사회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딸이 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길 바랐다. 만약 대단한 집안에 시집을 간다면 그림은 못 그리고 고생만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한 이유로 일부러 못난 사윗감을 베필로 정해주었다고 하는데 특히 그 당시에는 남귀여가라고 해서 신랑이 처가에 들어가 사는 풍습이 있어 신사임당은 시댁살이의 ‘시’자도 모른 채 자신이 자라온 집에서 편하게 혼인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그림도 계속 그릴 수 있었고 그 덕에 신사임당은 여자가 성공하기 힘들었던 그때 '안견에 버금가는 화가'란 평을 받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허난설헌은 달랐다. 자신의 집안과 동등한 아주 부유하고 벼슬 높은 양반가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이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때마침 조선 왕실에서는 혼인한 여자가 남편 집에 들어가 사는 친영제도를 시행하는데 사대부 집안에서 먼저 모범을 보이라고 한 탓이 허난설헌이 예정에도 없던 시댁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쓸데없는 TMI를 하나 덧붙이자면 친영제도를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세종대왕이다.


난 세종대왕님을 정말로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친영제도’만큼은 명백한 그의 실수이자 실패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더라면 수백 년 동안 우리나라 여성들이 시댁살이를 하며 고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특히 허난설헌은 친영제도 1세대라 할 수 있는 만큼 정말 모질고, 못되고, 견디기 힘든 시댁살이를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지금으로 치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던 터라 방패막이가 되어주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태평하게 시를 지을 수 있으랴.


허난설헌은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신이 낳은 두 아이를 키우는데 전념했다. 허나 불행하게도 두 자식 모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이 시를 쓸 수 있게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은 오라버니까지 객사하고 만다.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말고 더 슬픈 일은 없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허난설헌은 너무 충격이 컸던 탓인지 불과 몇 년 후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나이 불과 27살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생 허균에 의해 허난설헌의 시가 세상에 선보여지고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되어 지금까지도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


양반가의 집안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두 사람은 비슷한 듯 하지만 혼인 후 삶을 면면히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다른 인생을 살았다. 우스갯소리로 여자는 결혼만 잘하면 장땡이라고 하던데 허난설헌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시댁 살이만 안 했더라도 시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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