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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이로운 Jul 11. 2020

슈만이 '가곡의 왕'으로 불리게된 이유

#슈만과 클라라의 러브스토리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은 예술가들에게 늘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다. 프랑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는 6살 연하남에게 푹 빠져 단 15분 만에 <라비앙로즈>를 썼고, 작가 피천득은 첫사랑, 아사코를 떠올리며 <인연>을 집필했다.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한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는 짝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비너스의 탄생>에 담았다.


클래식 음악계 역시 감수성이 풍부한 예술인들이 모여있는지라 마치 영화와도 같은 러브스토리가 무수히 존재한다.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연애 썰부터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른 리스트, 지금까지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베토벤의 엘리제까지...! 오늘은 수많은 러브 스토리 중 클래식 역사상 '최고의 사랑'이라 꼽히는 로맨스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남자 주인공은 슈만, 여자 주인공은 클라라다.


두 사람의 인연은 슈만이 음악 교사였던 클라라 아버지에게 수업을 받게 되면서 시작된다. 슈만은 스승의 집에 지내면서 피아노, 작곡 등을 배우게 되는데 자연스레 스승의 딸이자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는 클라라와도 친해지게 되었다. 두 사람은 나이차가 무려 9살이라 처음에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슈만은 클라라를 귀여운 여자 아이로만 봤었고, 클라라 역시 슈만을 '나랑 잘 놀아주는 오빠'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클라라의 맘 속에 슈만을 향한 사랑이 샘솟기 시작하는데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스파르타 훈련을 받았던 그녀에게 웃음을 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슈만이기 때문이다.


클라라 슈만의 초상화


슈만은 약혼녀가 있기는 했지만 인연이 아니었던 건지 결국 헤어지게 되었고 때마침 아리따운 여인으로 성장한 클라라가 자길 좋다 하니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냉큼 사랑을 받아주었다. 이때 클라라가 16살, 슈만이 25살이었다. (슈만 도둑놈 -__-ㅋㅋㅋ)


이쯤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끝나면 좋으련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러브 스토리엔 언제나 시련이 뒤따르는 법이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말이다.


클라라의 아버지는 딸과 제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당장 헤어지라며 엄포를 놓는다. 클라라는 미래가 유망한 피아니스트였던 반면 슈만은 듣보잡에 불과했고 게다가 우울증까지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멀어 부모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던 클라라와 슈만은 "제발 우리 결혼하게 해주세요"라며 아버지, 그리고 스승을 상대로 소송까지 걸었다. 법정 싸움은 5년이나 지속되었는데, 때마침 클라라가 결혼을 할 수 있는 법적인 나이가 되어 법원도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주었다.


클라라와 슈만


11살, 20살에 만나 정확히 10년 후 부부의 연을 맺게 된 두 사람.


로맨티스트 슈만은 결혼식 전날, 유명 시인들의 시에 멜로디를 붙여 만든 가곡집 '미르테의 꽃'을 신부에게 헌정했다. 그중 가장 첫 번째 곡 '헌정'은 클라라를 향한 슈만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곡으로 가사가 아주 예술이다.


그대는 나의 영혼, 나의 심장이요

그대는 나의 기쁨, 나의 고통이며

그대는 내가 살아가는 나의 세계이자

그대는 내가 날아오르는 하늘.

그대는 나의 근심을 영원히 묻어버린 무덤,

그대는 나의 안식, 마음의 평화,

그대는 하늘이 내게 주신 사람

그대의 사랑이야말로 나를 가치 있게 만들고

그대의 시선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맑고 밝아진다네

그대의 사랑이 나를 드높이니

그대는 나의 선한 영혼이요

나보다 더 나은 나 자신이여


클라라는 결혼을 계기로 슈만에게 헌신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나 본데 집안에 딱 한대 있는 피아노를 슈만에게 온전히 내줄 정도로 내조에만 힘썼다고 한다. 그 덕에 슈만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곡을 쓰는 데만 집중해 결혼한 첫 해 동안 무려 138곡의 가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


슈만이 현시대에 와서 '가곡의 왕'이라 불리게 된 것도 아내, 클라라의 희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불행히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신병을 앓았던 슈만이 결혼 14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독일 태생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


35살에 과부가 된 클라라는 뒤늦게 다시 음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슈만과의 사이에서 낳은 7남매를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결혼 전, 피아니스트로 꽤나 이름을 날린 덕에 많은 이들이 클라라에게 연주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클라라는 남편이 생전에 작곡한 곡들을 비롯해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등 거장들의 작품을 주로 연주했다. 여성 음악가들에겐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19세기 유럽, 무려 1300번의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고 하니, 남편 못지않게 뛰어난 음악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남편이 남기고 간 악보를 정리해 출판까지 하는 정성을 보였기 때문에 슈만이 얻고 있는 명성의 8할은 클라라 덕이 아닌가 싶다.


예쁘고 어린 데다 피아노까지 잘 치고 내조까지 잘하는 클라라와 결혼한 슈만, 세상을 뜬 이후에도 아내 덕에 이름을 널리 알렸으니 이만하면 '가곡의 왕'보다는 '여자 덕 제대로 본 남자'라는 타이틀이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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