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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이로운 고작가 Jul 05. 2020

비발디가 좋아할 한국 노래

고리땡 바지를 즐겨 입고 콧물을 질질 흘리던 소녀는 TV 속 잘생긴 남자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멋스럽게 찢어진 청바지, 벨벳 느낌의 재킷, 시크함을 더해주는 선글라스, 중저음의 목소리까지... 세상의 멋을 혼자 다 가진 듯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HOT 강타 오빠랑 결혼할 거라 말했지만 원래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은 법. 소녀는 결혼 상대를 갈아치우기로(?) 결심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이를 알렸다.


"나 이현우랑 결혼할 거야"
"가수?"

"응. 헤어진 다음날 부른 사람!!!"


https://www.youtube.com/watch?v=DmXe-w56mAo

이현우 <헤어진 다음날>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이 발표된 1997년 겨울은 다른 해보다 유독 더 춥게 느껴졌다. 대한민국에 외환위기가 찾아왔기 때문인데 뉴스에선 연일 어느 기업이 망하고, 어떤 이가 자살을 했다는 등 나쁜 소식만을 전해왔다. 거리는 오갈 데 없는 실직자들로 넘쳐났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순간, 하지만 그때도 음악은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당시, 지누션이 부르고 엄정화가 피처링한 <말해줘>가 댄스곡 중 제일 큰 인기를 끌었고 발라드는 앞서 언급한 이현우 <헤어진 다음날>을 따라올 노래가 없었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제2악장을 샘플링한 이 곡은 노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아름답고도 구슬픈 바이올린 선율이 이어진다. 헤어진 다음날, 전 연인을 그리워하는 남자의 마음을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듯하다.


이현우 역시 이별의 후유증으로 몸서리치고 있을 때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우연히 비발디 <사계>를 듣고 작곡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단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든 노래는 지금은 사라진 음악방송,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를 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이현우에겐 힘들기만 했던 이별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zA_9GviJp8

손열음이 연주한 <사계> 겨울 제2악장


그러고 보니 이현우와 비발디는 비슷한 면이 있다. 비발디가 <사계>를 만들게 된 배경도 '전화위복'이라는 말과 딱 들어맞기 때문인데 그는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본래는 천주교 사제였으나 천식이 심한 탓에 기숙사 생활 대신 집에서 학교를 오갔고, 미사에도 자주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쩔 수없이 사제를 관두고 어린 시절부터 배운 바이올린으로 고아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게 되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만들게 된 곡이 바로 <사계>인 것이다.


아마 비발디가 사제직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하는 데다 신부수업을 받느라 바빠 곡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발디가 천식을 앓은 건 그에겐 좋지 않은 일일지 몰라도 클래식 역사에서 봤을 땐 봤을 때는 한없이 축복스러운 일이다.


비발디처럼 몸이 좋지 않았던 음악가들이 여럿 있는데 대표적으로 베토벤은 귀머거리였고, 바흐와 헨델은 시각 장애를 앓았고 차이코프스키는 극심한 우울증 환자였다.


새삼 음악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그 어려운 순간에도 음악을 들었고, 비발디는 천식을 앓고 교사로 일하는 그 바쁜 와중에 수백여 곡을 작곡했으며 베토벤은 본인 귀가 안 들리는데 귀로 듣는 음악을 만들었다.


악보를 보기가 힘든데 악보를 쓴 바흐와 헨델도 신기하고,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한 차이코프스키가 온통 행복으로 가득한 <호두까기 인형>을 발표한 것도 깜짝 놀랄 일이다.


'음악은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문득 이 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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