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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는 우리 아이, 나는 나.

비교해서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by 수프

여의도 성모 병원 안과에 다녀왔다. 아이의 시력이 나이에 비해 아주 좋지 않아 4개월마다 한 번씩 병원에 가야 한다. 매일 밤 자기 전에 눈에 약을 넣는 약물치료를 하고 있다. 병원에 도착하면, 접수하고 시력 검사를 한 후 이 방, 저 방을 돌며 여러 검사를 받는다. 오늘은 검사를 두 개만 했는데 바로 2번 방으로 가라고 했다. 2번은 교수님이 계신 방이다. 즉, 검사가 다 끝났다는 말. 빨리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는데 대기 순서 알림판에 ‘***교수님 진료 40분 지연’이라는 글자가 뜬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기 순서에 아이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대기 4번째까지만 이름이 나온다) 지루함에 몸을 비틀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세련된 엄마와 착해 보이는 딸이 2번 방 쪽으로 온다. 빈자리를 찾는 듯 주위를 쓱 보더니 바로 우리 앞 의자에 앉는다. 세련된 엄마의 착한 딸은 앉자마자 책을 편다. 우리 집 딸은 내 옆에서 이어폰을 끼고 최근에 컴백한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다. 아. 세련된 엄마의 머리 스타일은 아침부터 어쩜 저렇게 정갈할까. 머리 전체가 잘 세팅되어 있는데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딱 적정선이다. 입고 있는 검은색 가죽 재킷과 아주 찰떡이다. 그 집 착한 딸은 금세 책 한 권을 다 봤다. 키와 몸집을 보아하니 우리 아이랑 동갑이거나 한 살 정도 많을 것 같다. 그 아이는 심심하다면서 엄마에게 끝말잇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니 초등학교 1, 2학년도 아닌데 ‘엄마 핸드폰 보여주세요.’ 도 아니고 ‘끝말잇기’라니. 이런 순수한 학생이 있나.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하고 읽던 책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레미콘!”

앞자리에서 끝말잇기 하는 소리가 내 귀로 쏙 들어왔다.

‘레미콘 다음은 콘칩이지.’

난 그 집 엄마가 뭐라고 할지 궁금해 귀를 쫑긋 세웠다.

“콘트라베이스.”

아. 콘트라베이스가 있었구나.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작아진다.

그 뒤로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앞자리의 소리가 툭툭 내 귀로 들어왔다. 아이가 이야기하는 단어 수준이 대단하다.

세금, 획득, 확장, 일터

저 집 아이는 무슨 책을 읽는 걸까. 난 옆에 앉은 우리 아이 -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를 흘겨본다.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아이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대화를 했다. (남편은 출장 중이라 집에 없었다)

“엄마, 내가 아빠에게 시금치 된장국 있다고 카톡 보냈는데 시금치 된장국 맛없대.”

“치. 먹어보지도 않고서. 너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난 시금치 된장국 맛있다고 생각해.”

“그렇지? 엄마도 시금치 된장국 맛있다고 생각해.”

각자의 시금치 된장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후루룩 먹는다. 대화가 잠시 멈췄다. 심심해진 내가 말했다.

“시금치!”

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한다.

“쿵쿵따!”


통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중간에 ‘레미콘’이 나와서 ‘콘칩’으로 연결되었다. 난 게임을 잠시 멈추고 어제 안과 대기실에서 만났던 모녀의 끝말잇기 이야기를 해주었다. 끝말잇기를 하다 ‘레미콘’ 단어가 나왔는데 ‘콘칩’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니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뭐라고 했는데?”

“콘트라베이스.”

“엥? 콘트라베이스가 뭐야?”

역시. 콘트라베이스가 뭔지 모른다. 난 이미지를 찾아 보여주고 유튜브에서 클래식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틀어 들려주었다. 우리는 다시 밥을 먹는다. 클래식 음악이 우리와도 음식과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음악을 껐다. 우린 ‘레’로 시작하는 다른 단어를 말해 보기로 했다.

레전드, 드라마, 마징가, 가제트, 트리거로 연결되었다. 아이가 ‘거’로 시작되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지 고민한다.


난 힌트를 준다.

“네가 많이 하는 거 있잖아.”

“내가 많이 하는 거? ‘거’로 시작하는 말 중에서?”

“응. 모르겠어?”

“전혀.”

“‘엄마! 나 핸드폰 안 봤어! 진짜야.’ 이렇게 하는 거.”

“아하! 거짓말!”

“딩동댕동!”

“그런 거짓말 하나 보네. 바로 맞췄어.”


아이는 그냥 큭큭큭 웃는다. 아이와 함께 대화하는 아침이 좋다. 그래, 뭐 우리 애는 우리 애 나름의 매력이 있지. 나도 다른 사람과 다른 것처럼. 부디 아이를 향한 이 마음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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