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띠띠 띠띠띠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다!’
나는 컴퓨터 전원을 급하게 껐다. 엄마는 들어오자마자 거실을 휘 둘러본다.
“하리야, 가방 좀 치워. 숙제는 했어? 오자마자 손은 씻었지? 삼 학년인데 이젠 알아서 해야지. 참, 가방 안에 알림장도 가져올래? 가정통신문 있으면 그것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엄마의 잔소리에 슬슬 짜증이 올라온다.
“아, 엄마 잔소리.”
혼잣말이 나도 모르게 크게 나왔다.
“잔소리? 이게 왜 잔소리야? 그리고 네가 알아서 하면 엄마가 왜 이런 말을 하니? 내가 네 나이 때는 그렇지 않았어.”
요즘 엄마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내가 네 나이 때는 그렇지 않았어.’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나도 엄마 같아질 마음 눈곱만큼도 없거든요.’
알림장과 가정통신문을 보는 엄마의 코에 주름이 잡힌다.
“내일이 3학년 벼룩시장하는 날이네. 어머, 팔 물건을 다섯 개나 가져가야 해?”
“걱정 마. 어떤 물건 챙길지 내가 다 생각해 놨어.”
난 탐정 만화책 여러 권과 지우개 달린 볼펜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 정도면 내일 내 물건이 가장 인기 있겠지.
“이것들은 네가 아직 쓰는 거잖아. 벼룩시장에는 안 쓰는 물건을 가져가는 거야.”
말을 마친 엄마는 두리번두리번 내 방을 살핀다. 그러더니 방구석에 있는 꼬질꼬질 오래된 인형을 찾아 준비물 가방에 넣는다. 난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그런 걸 누가 사? 진짜 창피하게, 어휴.”
말끝에 큰 한숨이 딸려 나왔다.
“너 지금 한숨 쉰 거야? 어머나. 내가 네 나이 때는 그렇지 않았어.”
또 그 말이다. 난 그대로 침대로 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도 모르게 살짝 잠이 들었나 보다. 거실에 나와 보니 엄마가 소파에 누워 있다.
‘엄마, 자나?’
이대로 엄마가 고른 물건을 학교에 가져갈 수는 없다. 난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서재로 갔다. 여기에는 분명히 괜찮은 물건이 있을 것 같다. 벽을 둘러싼 커다란 책장을 위아래로 훑는다. 책장 맨 위 칸에 있는 연필꽂이 안에 알록달록 예쁜 색깔 펜들이 꽂혀 있다.
‘저 정도면 괜찮겠지? 아빠는 펜이 많으니까 몇 개쯤 없어져도 모를 거야.’
책장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그 위에 올라갔다. 색깔 펜을 향해 손을 높이 뻗었다. 순간 의자가 균형을 잃고 옆으로 기우뚱 넘어간다.
“으악!”
난 바닥에 떨어져 벽에 머리를 쾅 찧었다.
‘에이, 아파.’
온몸을 웅크린 채 두 손으로 쓱쓱 머리를 연신 비볐다. 화가 나서 머리가 부딪쳤던 벽을 발로 찼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더 짜증이 난다. 발끝에 힘을 주고 계속 벽을 찼다. 쿵. 쿵. 쿵. 그러자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오늘은 되는 게 없는 날이네.’
난 발차기를 멈추고 바닥에 떨어진 그림을 들고 천천히 일어났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림이 걸려 있던 벽에 네모난 금고가 있다. 가운데 열쇠 구멍도 있는 게 금고가 분명하다. 항상 이 자리에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설마, 금고를 숨기려고 그림을 걸어놓았던 거야?
난 힘을 주어 금고 손잡이를 당겼다. 열리지 않는다.
‘그래, 빈 금고가 아니라면 잠겨있는 게 당연하겠지.’
금고 손잡이를 흔들며 생각했다.
‘금고 안에는 뭐가 있을까?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보물? 아니면 귀한 보석? 보석이라면 보석 중에 가장 비싸다는 다이아몬드? 어쩌면 우리 집은 부자일지도 몰라.’
내 생각은 점점 더 멀리 날아간다. 머리의 통증은 어느샌가 사라졌다.
‘맞아, 책상 서랍 열쇠 꾸러미 속에 금고 열쇠가 있을 수도 있어.’
난 책상 서랍을 열어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열쇠마다 마커펜으로 이름이 적혀 있다. 화장실, 안방, 서랍 등등.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열쇠는 하나뿐이다. 조심히 열쇠 꾸러미에서 그 열쇠를 빼냈다. 그리고 열쇠를 비밀 금고 구멍에 꽂았다. 오른쪽으로 손을 돌리니, 내가 힘을 주는 방향을 따라 열쇠도 부드럽게 돌아간다. 딸깍. 심장이 빨리 뛴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끼익. 뻑뻑한 금고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에이, 이게 뭐야. 시시해.’
온몸의 힘이 풀린다. 책이다. 두꺼운 검은 표지의 딱 봐도 오래된 책. 크기도 두께도 재미없는 수학 문제집과 비슷하다. 그래도 그냥 금고를 닫기는 아쉽다. 책을 꺼내 활짝 펼쳤다. 먼지가 폴폴 날린다. 그런데 책 안에는 그림도 없고 글씨도 없다. 한쪽 면이 꽉 찰 정도로 큰 거울만 하나 붙어있을 뿐이다. 사실 거울 인지도 잘 모르겠다. 반질반질하고 매끈한데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햇빛을 비춰줘야 하나?’
빛이 들어오는 창문 쪽으로 책을 들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책을 위로 아래로 움직여봤다. 역시 똑같다. 실망한 마음에 책을 옆으로 휙 돌렸는데 책 속 거울에 뭔가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 내가 잘 못 봤나?’
책을 다시 옆으로 움직인다. 천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오, 나타난다, 나타나! 거울에 얼굴이 나타났다. 동그랗게 큰 눈, 오뚝한 코, 두꺼운 입술의 큰 입. 여자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하다.
“과거로 가는 통로를 찾으셨군요. 당신을 가고 싶은 과거의 시간과 장소로 데려다 드립니다.”
“으아아아악!”
너무 놀라 책을 떨어뜨렸다. 방 전체를 울리는 묵직한 소리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다시 책을 들었다. 천천히 옆으로, 옆으로 움직인다. 역시. 책 속 거울에 얼굴이 나타났다. 착각이 아니다!
“과거로 가는 통로를 찾으셨군요. 당신을 가고 싶은 과거의 시간과 장소로 데려다 드립니다.”
“과, 과, 과거의 원하는 장소로 데려다준다 고요?”
“네, 전 당신을 과거의 장소로 데려다주는 거울 책입니다. 책의 거울과 현실의 거울을 겹치게 들면 제가 살아나지요. 당신은 세 시간 동안 과거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 시간 안에 꼭 다시 현재로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과거에 갇히게 되지요. 한 사람이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으니 꼭 필요할 때 사용하십시오.”
책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거울 속 얼굴이 사라졌다. 책 속 거울과 서재의 거울을 겹치게 들어서 거울 책이 살아났구나. 그런데 과거에 갇힐 수도 있다니 오싹하다. 어느새 내 마음은 둘로 나뉘어 대화를 나눈다.
‘과거로 갔다가 과거에 갇히면 어떡해. 엄마도 아빠도 친구들도 다시는 못 만나잖아.’
‘세 시간 안에만 오면 되는데 뭐가 문제야?’
‘커다란 사건이 벌어져 시간을 못 지킬 수도 있지.’
‘그렇게 큰 사건이 쉽게 일어나겠어? 이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
결국 호기심이 무서움을 이겼다. 난 다시 책을 펼쳐 서재의 거울과 겹치게 들었다. 거울 속에 얼굴이 나타난다.
“가고 싶은 과거의 시간과 장소를 말해 주십시오.”
가고 싶은 미래는 많다. 내가 커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도 궁금하고, 내가 누구랑 결혼할지도 궁금하다. 그런데 가고 싶은 과거는 없는데. 한참 동안 내 말을 기다리던 거울 속 얼굴이 하품을 한다. 책을 들고 있는 내 손도 저릿저릿하다. 그때, 갑자기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내가 네 나이 때는 그렇지 않았어.’
요즘 너무 많이 들어 질려 버린 엄마의 말. 그래, 엄마가 내 나이일 때로 가자. 어릴 때 엄마가 어땠는지 직접 확인하고 와야지. 어린 엄마를 만날 생각을 하니 갑자기 웃음이 난다. 마치 진실을 파헤치는 탐정이 된 것만 같다.
“우리 엄마 김지혜가 초등학교 삼 학년이었을 때, 우리 엄마가 살던 동네로 갈래요.”
“그럼,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