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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를 찾아야 해!

by 수프

거울 속에서 엄청나게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태풍 같은. 휘이잉 위이잉. 서재의 책장이 흔들거리고 책들이 쏟아진다. 내 몸은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떠올랐다. 태풍이 부는 대로 사정없이 휘둘린다. 거울이 커졌는지 내 몸이 작아졌는지 어느 순간 난 거울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깜깜한 통로를 지나는 것 같았는데 금세 환한 빛이 비친다. 아래에는 놀이터와 아파트가 있다. 시간의 통로를 지나온 건가. 바람은 점점 세기가 약해지더니 날 놀이터 잔디밭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금 뒤 내 옆으로 거울 책이 툭 떨어졌다. 책 표지 위에 이곳의 날짜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크게 나타났다.


1988년 7월 03일

02:59


대체 몇 년 전으로 온 거야? 무려 34년 전이다.

‘참, 책을 잃어버리면 안 되지.’

난 책을 양손으로 꼭 껴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이 우리 엄마가 살던 곳이라고? 대략 삼십 년 전인데 지금과 비슷하다. 우리 집처럼 아파트 사이에 놀이터가 있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잔디밭이 많다는 것, 주차장에 차가 별로 없다는 것. 뭐 그 정도? 참, 그런데 우리 엄마는 어디 있지?


놀이터에는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이 놀고 있고 그 옆 잔디밭에는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이 수다를 떨고 있다. 아무리 봐도 엄마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큰일이네. 급한 마음에 놀이터와 그 옆 상가,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았다.

“아휴, 엄마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난 다시 놀이터로 왔다. 한 손으로 책을 껴안고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이 있는 의자 옆에 앉았다. 어디에 가서 엄마를 찾지……하고 생각하는데, 여자아이들의 유치한 대화가 들린다.


“민호가 더 멋있지 않냐?”

“무슨 소리야, 정우가 더 멋있지. 방금 정우가 미끄럼틀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거 못 봤어?”

“저 장난꾸러기들이 뭐가 멋있냐? 난 둘 다 관심 없어.”

“에이, 아닌 것 같은데? 아까 정우가 뛰어내릴 때 네 눈 커지는 거 다 봤거든!”

“됐고! 너희 저번 주 가요톱텐 봤어? 강남정 오빠 나왔다고! 내가 엄청 열심히 오빠 춤을 연습했지, 잘 봐봐.”


궁금한 나머지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안경 쓰고 키 큰 여자아이가 엉거주춤하게 서더니 손을 턱 위로, 턱 아래로 찌른다. 크크, 저게 무슨 춤이야. 하마터면 크게 웃을 뻔했다. 다행히 나의 작은 웃음소리는 다른 여자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에 묻혔다.

“야, 너 웃기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그게 무슨 춤이냐? 나도 그 정도는 추겠다.”

“나도 나도.”

이번엔 나머지 두 명이 일어난다. 엉거주춤하게 서서 손을 턱 옆으로, 턱 아래로 번갈아 가며 찌른다. 율동인지 체조인지 춤인지 모를 행동을 반복한다.

‘어머, 쟤들 왜 저래.’

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내가 춤을 가르쳐주고 싶을 정도다.

“어머, 수학 학원 늦겠다. 우리 먼저 갈게.”

“응, 내일 봐.”

처음 춤을 춘 키 크고 안경 쓴 여자아이만 남았다.

‘삼십 년 전에도 학원이 있었구나. 아차,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야. 어서 엄마를 찾아야지.’


난 정신을 차리고 키 크고 안경 쓴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저기, 너 혹시 이 동네 사는 열 살, 김지혜라고 알아?”

안경 쓴 여자아이는 눈을 작게 뜨더니 나를 위아래로 살핀다.

“김지혜? 열 살? 삼 학년 김지혜라고?”

“응.”

“내가 삼 학년 김지혠데?”

“에에? 네가 김지혜라고?”

“응. 왜?”


우리 엄마는 키가 작은데 얘는 왜 키가 크고 우리 엄마는 안경을 안 쓰는데 얘는 왜 안경을 썼지?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게,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지만……음, 예전에 헤어진 우리 친척……을 찾고 있거든.”

“아, 그래? 그럼 난 아닌 것 같고, 우리 학교 삼 학년에 나 말고 김지혜가 세 명 더 있어.”

“뭐? 그럼 김지혜가 너까지 네 명?”

“응, 나까지 네 명, 나 빼고 세 명.”

으악. 우리 엄마는 그 세 명 중에 누구일까. 엄마 이름은 왜 이렇게 흔한 거야.

“그러니까. 음, 내가 찾는 김지혜는 키가 작고 예쁘고 안경을 안 썼어. 그리고 말이 좀 많아. 수다쟁이. 혹시 세 명 중에 이런 아이가 있을까?”

“김지혜 중에 제일 예쁜 애는 난데? 크크크.”

‘얘, 난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야.’

정색하고 싶지만 지금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아이뿐이다. 난 열심히 기분을 맞춰 준다.

“하하하, 그럼 너 다음에 예쁜 애를 생각해 봐. 키가 작고 안경 안 쓰고, 말이 많은 예쁜 애 말이야.”

엄마는 자신의 인생 중에서 초등학교 때가 가장 예뻤다고 했다.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니 거짓말은 아닐 거다. 내 앞의 김지혜는 손에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한다.

“나를 뺀 김지혜 세 명 중 한 명은 안경을 쓰고 아주 조용한 성격이야.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먼저 말을 거는 일이 거의 없었어. 목소리도 작고. 그 한 명을 제외하면 두 명이 남아. 둘 다 안경을 안 쓰고 키도 별로 안 크고. 음, 말하는 것도 좋아해. 예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 내가 찾는 김지혜가 그 둘 중 한 명이겠네.”

“아마도.”

지혜는 재미있는 사건이 생겨 신난다는 듯 종아리를 의자 앞뒤로 흔들었다.


“저, 지혜야, 너 바빠? 혹시 만약에, 바쁘지 않다면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난 김지혜 얼굴을 잘 몰라서 말이야. 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정말 사정이 있어서 ‘김지혜’를 꼭 찾아야 해.”

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좋아. 넌 정말 운이 좋은 거야. 내가 지금 수학 학원을 땡땡이치는 중이라서 말이야. 어차피 갈 데도 없었는데 마침 잘 됐다.”

“뭐? 수학 학원을 땡땡이? 안 갔다고? 왜?”

“숙제를 안 했거든. 숙제를 안 해가면 얼마나 혼난다고. 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야. 내가 풀고 싶어도 어려워서 풀 수가 없었거든.”

“히히. 나도 수학 싫어하는데. 수학 어렵다고 하면 어른들은 그게 뭐가 어렵냐며 뭐라고만 하지.”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오, 우리 잘 통하는데!”

난 나도 모르게 하이파이브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 지혜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탁 친다. 휴, 다행이다. 삼십 년 전에도 하이파이브는 있으니. 지혜는 의자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며 말했다.

“그럼 이제 김지혜들을 찾으러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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