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있던 책을 가지고 일어났다. 책 표지에 남은 시간이 보인다.
02:20
“그래, 빨리 가자. 난 시간이 얼마 없거든.”
“응, 알겠어. 두 명의 김지혜 중에서 한 명은 지금 피아노 학원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선 학원 안 다니는 김지혜부터 찾으러 가자.”
“좋아. 네가 있어서 든든하다!”
난 얼른 지혜의 팔짱을 꼈다. 지혜도 싫지 않은지 날 보고 피식 웃는다.
잔디밭 앞 놀이터를 지나는데 지혜는 뭘 봤는지 내 팔을 끌고 놀이터로 간다.
“너 정말 운이 좋은데! 저기 지혜 동생이 있어.”
지혜는 놀이터에서 모래 놀이를 하는 유치원생에게 다가가 묻는다.
“안녕, 너희 언니 지금 어디에 있어?”
“언니, 안녕. 우리 언니, 방방이 타러 갔는데?”
“뭐? 저기 학교 앞 공터에 있는 방방이?”
“응.”
“휴, 알겠어.”
지혜가 말을 거는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봤다. 지금 찾는 지혜가 우리 엄마라면 저 유치원생 아이는 우리 이모겠지. 그러고 보니 이모랑 닮은 것도 같다.
‘여동생도 있는 걸 보면 방방이를 타고 있는 지혜가 우리 엄마일 것 같은데.’
난 얼른 어린 엄마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지혜를 재촉했다.
“방방이가 있는 곳에 얼른 가 보자.”
“알았어. 도와주기로 했으니 좀 멀어도 가야지. 어서 가자.”
놀이터를 나와 아파트 동 몇 개를 지나서 횡단보도 앞에 섰다. 맞은편에 학교가 보인다.
“저기 보이는 학교 뒤 공터에 방방이가 있어.”
“응”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지혜는 이제야 나에게 묻는다.
“참, 그런데 너 몇 살이야? 이름은 뭐고?”
“어머, 내가 내 이름과 나이도 말 안 했네. 나도 삼 학년, 열 살이야. 이름은 장하리. 장한 사람이 되라고 엄마 아빠가 지어 주셨어.”
“우아, 이름 예쁘다. 내 이름은 너무 흔해서 싫어.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학년만 해도 김지혜가 무려 네 명이라니까. 성이 다른 지혜들까지 모으면 훨씬 많아. 오지혜, 강지혜, 이지혜, 권지혜도 있어. 만약 나도 커서 딸을 낳게 되면 너 같이 예쁜 이름으로 지어 줄 거야.”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었다. 지혜는 걸어가면서도 끊임없이 말한다.
“하리야, 넌 어디 국민학교 다녀?”
‘응? 국민학교?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엄마에게 들은 것 같다. 엄마가 학교 다닐 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고.’
“나는 저기 멀리서 살아. 이 근처 친척 집에 잠깐 온 거야.”
“그렇구나. 참, 지금 방방이 타고 있는 김지혜는 우리 반 반장이야. 이번 중간고사에서도 일 등을 했어. 내 이름과 같아 헷갈리니까 걔는 그냥 반장이라고 부르자.”
“응. 좋아. 방방이 타는 지혜는 반장.”
공부 잘하는 김지혜라. 그렇다면 우리 엄마일 가능성이 높다. 엄마는 어릴 때 모범생이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초등학생인데도 시험을 보고 등수를 안다고? 난 삼십 년 전 초등학생의 생활이 궁금해졌다.
“지혜야, 너희 학교는 시험을 보고 나서 몇 등인지도 알려 줘?””
“당연하지.”
“그냥 수업시간에 잠깐 보는 시험을 말하는 거지?”
“뭐? 시험 보는 날은 하루 종일 시험만 보잖아. 네가 다니는 학교는 안 그래? 설마 시험을 안 보는 건 아니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니, 시험 보지, 안 보긴 왜 안 봐. 보긴 보는데 몇 등인지는 모르거든.”
“그건 네가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겠지.”
지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한다. 그래, 그런 척하자.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하하하. 맞아, 난 공부하는 게 싫어. 지혜야, 넌 공부가 좋아?”
“당연히 싫지. 난 공부 없는 세상으로 가고 싶어. 한 삼십 년쯤 뒤에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을까? 로봇이 대신 공부해 주고 말이야.”
난 지혜의 어깨에 손을 탁 올렸다. 그러고는 속으로 말했다.
‘지혜야, 삼십 년 뒤에도 그런 세상은 오지 않는단다.’
그때 내 눈에 방방이가 들어왔다. 넓은 공터 나무 그늘 아래 동그란 방방이가 덜렁 하나 놓여 있다.
“지혜야, 저기 저 방방이가 네가 말한 방방이 맞지?”
“응.”
동그란 방방이 밖으로는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게 그물이 처져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돈 받는 것처럼 보이는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계신다. 지혜는 방방이에 둘려진 그물을 손으로 잡고 안에 있는 아이들을 열심히 살펴본다. 난 지혜 뒤에 서서 물었다.
“누가 너희 반 반장이야?”
“어? 여기 반장이 없는데?”
“뭐?”
지혜는 다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오라고 손짓한다.
“재경아, 재경아! 우리 반 반장 김지혜 여기 없어?”
“조금 전에 저기 지하도 쪽으로 갔는데.”
“뭐? 지하도? 알았어.”
지혜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고 짜증 섞인 말투로 혼잣말을 했다.
“아휴, 얘는 왜 지하도 쪽으로 간 거야.”
“왜? 왜? 지하도가 여기서 멀어?”
“그건 아닌데, 사람들이 잘 안 다녀서 엄마 아빠가 가지 말라고 한 곳이거든.”
“그래? 그럼 반장이 있는지 없는지만 후딱 가서 보고 오자. 응?”
“어쩔 수 없지. 그러자.”
지혜는 지하도로 가는 내내 계속 구시렁거렸다. 다행히 지하도는 멀지 않아 곧 도착했다. 낮인데도 지하도 안
은 어두컴컴하다. 벽에 낙서도 잔뜩 되어 있는 게 들어가고 싶지 않다. 우린 입구에서 반장의 이름을 불렀다.
“지혜야, 김지혜!”
안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린다.
“하리야, 반장 안에 있나 보다. 들어가자.”
우린 손을 잡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저기 있다!”
지혜가 손가락으로 한 아이를 가리켰다. 단발머리에 키가 작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아이다. 우릴 보더니 반가
운 것 같기도 당황한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 아이 옆에는 키가 큰 언니 두 명이 서 있다. 우리를 보고 손을 까딱까딱한다. 아마도 그쪽으로 오라는 뜻이겠지. 노란 머리띠를 한 언니와 껌을 씹고 있는 언니. 딱 봐도 무서운 언니들이다. 자고로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에잇,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