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왜 방방이를 타다 말고 지하도에 온 거야? 네가 지하도에만 안 갔어도 내 오백 원은 아직 내 주머니에 있었을 거라고.”
반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말이야, 내가 방방이를 타고 있는데, 저 멀리서 현수가 지나가는 게 보이잖아.”
“현수? 우리 반 장난꾸러기 현수?”
“어. 현수 좀 잘 생기지 않았냐?”
“뭐? 야, 너도 안경 좀 써야겠다.”
지혜들은 낄낄 웃으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했다. 대화를 정리하자면, 반장은 같은 반 현수를 좋아한다. 그런데 마침 방방이를 타다가 지나가는 현수를 봤다. 반장은 지름길인 지하도를 통과하면 자연스럽게 횡단보도에서 현수와 마주친다는 생각을 단 일 초만에 해냈다. 스스로의 계획에 감탄하며 방방이에서 나와 열심히 지하도로 달렸다. 그런데 아뿔싸, 그만 계획에 없었던 무서운 언니들을 만나게 된 거다.
두 지혜는 뭐가 그리 웃기는지 이야기를 하며 연신 웃어댄다.
‘엄마는 내가 연예인이나 학원의 잘생긴 오빠 얘기를 하면 항상 뭐라고 했지. 초등학교 삼 학년이 벌써 그런 얘기를 한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게 뭐야, 삼십 년 전 애들도 똑같잖아.’
그나저나 반장이 내가 찾는 김지혜가 아니라니 큰일이다. 모범생에 일 등이라고 해서 정말 엄마 일 줄 알았는데. 난 한 손에 꼭 들고 있던 책의 표지를 슬쩍 봤다.
01:20
‘아. 이제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남았어.’
난 지혜에게 또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눈은 아래로 뜨고 입은 살짝 내밀고.
“지혜야, 또 다른 지혜는 지금 피아노 학원에 있다고 했지? 그 피아노 학원까지만 같이 가 주면 안 될까? 귀찮게 해서 미안해.”
“아, 맞다. 내가 깜박했어. 아까 놀이터 앞 상가에 있는 피아노 학원이야. 이제 거의 다 왔어.”
“정말 고마워.”
상가 앞에서 반장과는 헤어졌다. 반장은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놀이터로 마구 뛰어갔다. ‘오늘의 두 번째 김지혜 안녕.’
“참, 지금 만나는 김지혜 별명은 검은 땅콩이야. 내 이름과 같아 헷갈리니까 피아노 학원에 있는 김지혜는 검은 땅콩이라고 부르자.”
“응. 피아노 학원에 있는 김지혜는 검은 땅콩.”
난 쫄래쫄래 오늘의 첫 번째 지혜를 따라 상가 2층으로 올라갔다. 지혜는 상가 2층의 피아노 학원 문을 살그머니 열고 묻는다.
“선생님, 여기 삼 학년 김지혜 있어요? 잠깐만 불러주시면 안 돼요? 정말 잠깐이면 돼요”
지혜는 문을 잡은 채로 고개를 뒤로 돌려 나에게 말했다.
“다행이야. 검은 땅콩 아직 여기에 있대.”
조금 뒤 피아노 학원 안에서 땅땅하게 생긴 까맣고 귀여운 아이가 나온다. 정말 검은 땅콩 같이 생겼다. 오늘의 마지막 김지혜다. 세 번째 김지혜.
“어, 네가 학원까지 무슨 일이야?”
지혜를 보는 검은 땅콩의 눈이 동그래졌다.
“말하자면 좀 길어. 너 피아노 학원 언제 끝나?”
“십 분 뒤쯤?”
“피아노 학원 끝나고 이 앞 놀이터로 올 수 있어? 내가 할 말이 좀 있어서. ”
“좋아. 그럼 이따 봐.”
검은 땅콩은 다시 학원 안으로 들어갔다.
“쟤야. 검은 땅콩. 쟤는 음, 노래하는 걸 좋아해. 노래 실력은 별로지만 말이야. 어때? 네가 찾는 김지혜 같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참, 검은 땅콩은 동생이 있어?”
“그건 잘 몰라. 쟤가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거든. 우린 만나면 항상 연예인 얘기만 해서. 헤헤.”
“뭐 이따 물어보면 되겠지.”
“네가 찾는 사람이 맞으면 좋겠다.”
지혜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엄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얼굴이 까맣다. 어릴 때는 까맣다가 커서는 하얘질 수도 있나. 검은 땅콩이 우리 엄마여야 하는데 왠지 아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래도 아직은 모르는 일이니까.
놀이터에 오니 놀이터 앞 잔디밭에 클로버가 눈에 들어온다. 난 네 잎 클로버 찾기 선수다. 나도 모르게 클로버 앞에 쪼그려 앉았다. 역시, 금세 네 잎 클로버 하나를 찾았다.
“아, 찾았다!”
소리를 들은 지혜가 냉큼 내 쪽으로 뛰어온다.
“진짜 네 잎 클로버네! 난 네 잎 클로버 실제로 처음 봐. 너 대단하다.”
지혜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진다.
“나 네 잎 클로버 엄청 잘 찾아. 또 하나 찾아볼까?”
다시 고개를 숙이고 클로버를 뒤적뒤적.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또 하나를 찾았다. 난 네 잎 클로버를 지혜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우아, 어떻게 이렇게 잘 찾아?”
“특별한 비결은 없어. 그냥 직감을 따를 뿐이지. 하하.”
난 방금 찾은 네 잎 클로버 하나를 지혜에게 내밀었다.
“이거 너 가져. 나 하나, 너 하나.”
“고마워.”
지혜는 네 잎 클로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잎 클로버를 가지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우리 같이 소원 빌자.”
네 잎 클로버를 처음 보는 지혜는 아주 진지하다. 곰곰이 소원을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오랜만에 소원을 빌어봐야지. 난 네 잎 클로버를 두 손으로 꼭 쥐고 말했다.
“난 내가 찾는 김지혜를 꼭 만나게 해달라고 빌래.”
“아마 찾을 수 있을 거야. 검은 땅콩이 맞을걸. 우리 동네 삼 학년 김지혜 네 명 중에 수다쟁이고 키 작고 안경 안 쓴 김지혜는 걔가 마지막이니까. 뭐 예쁜 건 잘 모르겠지만.”
“응. 참, 넌 어떤 소원 빌 거야?”
“나는 수학 학원 안 다니게 해달라고 빌 거야.”
“세상의 많고 많은 소원 중에 겨우 그런 소원이라고?”
“겨우라니! 나한텐 중요하다고.”
지혜는 기도하는 것처럼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