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눈을 뜨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로 들어가 쏙 숨었다. 미끄럼틀 옆으로 고개만 살짝 내밀고 누군가를 쳐다본다. 나도 지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지혜가 쳐다보는 아줌마를 본다.
‘저 아줌마가 누구지? 저 사람……우리 엄마랑 조금 닮은 것 같은데. 음, 진짜 비슷한데?’
그 아줌마는 커다란 마트 비닐봉지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비닐봉지 안의 파가 위로 삐죽 튀어나왔다. 한 손으로는 연신 이마의 땀을 닦는다. 아는 사람을 만났는지 아파트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민주 엄마! 민주 엄마!”
목소리가 커서 내가 있는 곳까지 대화가 다 들린다.
“어? 301호 아녀? 이 땡볕에 무슨 장을 보고 와? 파는 왜 이리 많이 샀대?”
“아이고, 정말 덥네. 오늘 비 온다고 해서 오징어 듬뿍 넣어 파전하려고. 맛있게 해서 그 집에도 보낼게.”
“아이고, 뭘 또 준다 그래. 그리고 이렇게 날이 좋은데 비는 무슨 비?”
“흐이구, 저기 저 쪼끄만 먹구름 안 보여? 내 생각엔 일기예보대로 비가 올 거 같어. 어쨌든, 저녁 먹기 전에 우리 집 애가 파전 가지고 갈 테니 그리 알아.”
“아이고, 고맙네. 고마워. 조심해서 들어가.”
“응, 응”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 엄마를 닮은 저 아줌마는 우리 외할머니인가? 그런가? 목소리도 그렇고, 나눠 먹기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비 올 때마다 파전을 부치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엄마랑 똑같이 생겼다. 작년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 갑자기 눈이 뜨거워진다. 난 아파트로 들어가는 외할머니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본다. 뛰어가서 잡을까? 잡으면, 잡으면 뭐라고 하지?
“하리야, 너 뭐 해? 휴.”
지혜는 내 쪽으로 오더니 한숨을 쉬며 말한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을 비볐다.
“아, 그냥.”
“우리 엄마한테 들킬 뻔했네. 하필 이 시간에 장을 보고 올 건 뭐람.”
“누가, 누가 너희 엄마야?”
“지금 지나간 저 아줌마. 장본 거 들고 지나가던 아줌마 못 봤어?”
그러면 내 앞에 있는 지혜가 우리 엄마?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뛴다. 콩닥콩닥 콩닥콩닥. 나는 숨을 한번 크게 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하마터면 엄마한테 학원 안 간 거 걸릴 뻔했구나. 하하.”
“그러니까. 큰일 날 뻔했어.”
“참, 지혜야, 네 동생 이름이 소진이라고 했지?”
지혜는 눈이 동그래지며 날 봤다.
“갑자기 뭔 소리야? 그런데 내가 너한테 동생 이름까지 얘기했었나? 별 얘기를 다 했네. 응, 내 동생 이름은 소진이야. 그런데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동생 이름 이쁘다고.”
“그치? 내 이름은 이렇게 흔하게 지어놓고선 동생 이름은 이쁘게 지어 준 거 있지. 내가 불평하면 엄마는 내 이름이 예뻐서 많은 거래. 치.”
난 어린 엄마의 얼굴을, 손을, 다리를, 온몸을 본다. 왠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엄마는 어릴 때 키가 컸었구나. 나도 큰 편인데 나보다 5 센티미터는 더 큰 것 같네. 엄마는 어릴 때 눈이 나빴구나. 초등학교 삼 학년인데 벌써 안경을 쓰다니. 지금 엄마는 눈이 좋은데.
“갑자기 왜 날 빤히 봐? 내가 너무 예뻐서? 헤헤.”
웃기지 않은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정말 우리 엄마다.
“지혜야, 지혜야!”
저기 멀리서 검은 땅콩이 손을 흔들며 뛰어온다.
“늦어서 미안. 할 말이란 게 뭐야? 구급차 오빠들 신곡 춤 다 외웠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다 외웠지.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고.”
지혜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검정 땅콩의 말을 듣자마자 춤을 춘다. 앉았다 일어났다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뻣뻣한 몸으로 너무 열심히 춘다. 난 웃음을 꾹 참았다. 잠시 춤을 추던 지혜는 숨을 헐떡이며 의자에 털썩 앉는다. 검은 땅콩은 그제야 날 발견했는지 지혜에게 물었다.
“얘는 누구야? 너랑 많이 닮았는데? 친척이야?”
지혜와 난 눈이 동그래져 서로 쳐다보며 말했다.
“닮았다고?”
“응. 친척이야?”
지혜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에이, 닮긴 뭐가 닮아? 내가 더 예쁘지. 오늘 놀이터에서 처음 만났는데 좀 친해졌어.”
검은 땅콩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참, 근데 나한테 할 말이 뭐야?”
“아, 그게 뭐냐면…….”
지혜는 나를 본다. 난 오늘의 ‘세 번째 김지혜’인 검은 땅콩에게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김지혜를 찾고 있는 사정을 설명했다.
“어릴 때 잃어버린 친척을 찾는다고? 나는 아닐 것 같은데. 혹시 찾는 사람의 몸에 특별한 특징이 있어? 큰 상처가 있다든지 큰 점이 있다든지, 뭐 그런 거 말이야.”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동네를 잘 못 찾아온 거 같아. 오늘 만난 김지혜들은 다 아니거든.”
내 말을 듣고 오늘의 ‘첫 번째 김지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동네를 잘 못 찾아온 거 같다고? 그럼 나 괜히 고생했잖아.”
“헤, 미안해. 그렇지만 학원 땡땡이치고 혼자 놀이터에 있는 것보다는 재밌었잖아.”
“그래도 좀 힘들었다고. 아니 많이 힘들었다고!”
“알아, 알아. 그리고 진짜로, 진짜로 고마워.”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내가 너 때문에 오백 원도 빼앗기고 그리고…….”
난 지혜의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말을 끊었다.
“지혜야, 너 집에 가기 전까지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까?”
어린 엄마와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다.
“그럼 그럴까?”
난 잔디밭에 놓인 책을 살짝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00:40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검은 땅콩은 엄마가 찾을지도 모른다며 집으로 간다고 했다.
“나 먼저 갈게. 그리고 하리야, 네가 찾는 김지혜 꼭 찾길 바랄게. ‘김지혜’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우리처럼 예쁘고 착하거든. 분명 좋은 사람일 거야. 그럼 안녕!”
“응, 고마워. 안녕!”
오늘의 세 번째 김지혜’가 갔다. 난 오늘의 주인공인 첫 번째 김지혜에게 물었다.
“놀이터에서 뭐 하고 노는 거 좋아해?”
“음, 잡기 놀이나 얼음 땡은 사람이 더 많아야 하고. 둘이서는 바이킹이 최고지.”
“바이킹? 바이킹이 뭐야?”
“별거 아냐. 그냥 둘이서 한 그네를 같이 타는 거야. 한 사람은 앉고, 한 사람은 서고. 셋, 넷이 모이면 그네를 연결해서 더 재미있게 할 수도 있어. 그런데 둘이서도 재미있을 거야. 왜냐? 내가 그네를 아주 세게 구르거든.”
“그래, 그럼 바이킹 놀이하자.”
어린 엄마는 벌써 저만큼 뛰어간다.
“같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