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희 얘 친구들이야? 마침 잘됐네. 우리가 지금 이 동네에 놀러 왔다가 집에 가려는데 버스비 천 원이 딱 모자라거든. 천 원 있으면 좀 빌려줄래? 이 언니들이 고마운 마음 평생 잊지 않을게. 응?”
도망가고 싶지만 온몸이 얼어버렸는지 움직일 수가 없다. 무서운 언니들에게 잡혀있던 반장은 슬금슬금 우리 뒤로 온다. 이제 언니들의 관심사는 우리다.
‘천 원……천 원이라고. 천 원만 있으면 된단 말이지.’
생각해보니 천 원이 있다! 엄마가 나보다 집에 늦게 오시는 날은 간식비로 천 원을 주신다. 바로 오늘이 그날이었지. 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천 원이 있는지 확인했다. 아, 느껴진다. 바스락바스락 천 원의 감촉.
“너 뭐 좀 있는 모양인데?”
언니들은 그새 내 표정을 봤나 보다.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저, 확실하지는 않은데요.”
“주머니에 있는 거 빼 봐. 언니들이 못된 사람이 아니라 정말 집에 갈 차비가 모자라서 그러는 거야.”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언니가 말했다. 모든 사람의 눈은 내 주머니를 향했다. 난 주머니 속에서 파란색 퇴계 이황이 그려진 천 원을 꺼냈다. 그리고 그 돈을 껌 씹는 언니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언니가 돈을 잽싸게 낚아챈다. 그러고는 내가 내민 천 원을 유심히 본다. 언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왜, 왜 그러지?’
“얘가 지금 장난하나? 어디서 시장 놀이하던 가짜 돈을 내밀어?”
언니가 껌을 바닥에 퉤, 뱉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노란 머리띠를 한 언니가 천 원을 가져갔다.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천 원을 들고 자세히 본다.
“이야, 감쪽같네. 진짜 천원인 줄 알았잖아.”
껌 뱉은 언니가 이어 말한다.
“우리를 무시한다 이거지? 천 원짜리가 분홍색이라는 건 유치원생도 알거든!”
‘으악. 삼십 년 전의 천 원은 분홍색인가? 언니들은 내가 가짜 돈을 냈다고 생각하는구나.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이를 어째.’
속으로만 말할 뿐 실제로는 입술을 옴짝달싹할 수도 없다. 언니들은 내 주위를 뱅글뱅글 돈다. 심장이 쿵 쿵 쿵 쿵 마구 뛴다.
‘아, 나 왜 과거로 온 거야. 어릴 때의 엄마를 만나서 뭐 하려고. 망했어, 망했어.’
바로 그 순간 지혜가 내 앞으로 섰다. 허리를 살짝 숙이고 한껏 웃음을 지은 표정이다.
“언니들, 죄송해요. 얘가 좀 모자라서 그래요. 아직 가짜 돈과 진짜 돈도 구분을 못하거든요. 저희 동네에서는 얘가 바보라는 거 다 알아요. 언니들은 이 동네 안 살아서 잘 모르시죠.”
‘얘가 뭐라는 거야.’
나는 어쩔 수 없이 바로 연기에 들어갔다. 약간 눈이 풀린 척. 이렇게 멍하니 먼 곳을 보면 되려나.
언니들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지혜는 주머니를 뒤적뒤적하더니 동전 하나를 꺼내며 말한다.
“언니, 제가 지금 딱 오백 원이 있는데, 이걸로 안될까요? 지금 얘를 얘네 엄마한테 데려다 주기로 해서 빨리 가봐야 하거든요.”
노란 머리띠를 한 언니가 재빠르게 오백 원을 가져가며 말했다.
“너희 정말 운 좋은 줄 알아.”
껌 뱉은 언니도 똑같이 말했다.
“그래, 너희 정말 운 좋은 줄 알아.”
마침 그때 맞은편 지하도 입구에서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언니들은 바쁘게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걷는다고 하기에는 훨씬 더 빠른 걸음이다. 언니들이 지하도 밖으로 사라진 후, 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혜와 반장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반장은 허리를 굽혀 나를 빤히 본다. 그러고는 지혜에게 이렇게 물었다.
“얘 진짜 바보야?”
‘나를 보고 하는 말인가.’
“푸하하 하하하. 얘 바보 아니야.”
지혜가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난 머리를 휙 들어 둘을 째려봤다.
“나 바보 아니거든! 바보는커녕 천재 쪽에 더 가깝다고!”
“아. 아니었구나. 미안. 그럼 그 천 원은 왜 언니들에게 준 거야? 가짜 돈을?”
순간 말이 막혔다. 삼십 년 후의 미래에서 온 돈이라고 하면 이번엔 바보가 아니라 미쳤다고 하겠지.
“음, 가짜 돈을 주고 도망가려고 했지. 타이밍이 좀 안 맞았지만.”
“뭐야, 그런 거였어? 타이밍이 조금 안 맞은 게 아니라 전혀 안 맞았는걸!”
반장의 말에 지혜가 이어서 말한다.
“어쨌든 하리야, 넌 나의 순발력에 감사해야 해. 언니들 화난 거 봤지? 너 한 대 맞았을 수도 있었어. 게다가 내 비상금 오백 원도 빼앗겼다고.”
“지혜야, 정말 고마워.”
난 진심으로 말했다. 엄마고 뭐고 과거에 영영 갇힐 수도 있었으니까.
반장은 지혜에게 물었다.
“그런데 얘 누구야? 지하도에는 왜 왔고?”
지혜는 내가 ‘이 동네 삼 학년 김지혜’를 찾고 있다는 것과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날 찾으러 온 거구나. 어릴 때 헤어진 친척을 찾는다고? 네가 찾는 김지혜가 나 맞지 않아? 응? 날 좀 자세히 봐봐.”
난 반장의 눈, 코, 입을 자세히 봤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입도 별 특징이 없고. 딱히 우리 엄마와 닮은 것 같지 않다. 휴, 어릴 적 엄마를 찾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반장도 지혜처럼 종알종알 말이 많다.
“난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어딘가에 진짜 착하고 부자인 엄마가 있을 줄 알았다니까. 지금 엄마는 매일 나한테 짜증만 내고, 동생이랑 싸우면 나만 혼내거든. 역시 친엄마가 아니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반장은 혼자 들떠서 김칫국물을 마신다. 수다스러운 것, 키가 작은 것, 안경을 안 쓰는 것 그리고 이름만으로 우리 엄마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난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장에게 말했다.
“사실 잘 모르겠어.”
“정말? 내 얼굴을 잘 보라니까.”
반장은 내 어깨를 잡아 자신의 방향 쪽으로 틀었다. 자신의 얼굴을 내 얼굴 앞으로 바짝 들이민다.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때 지혜가 반장에게 아주 훌륭한 질문을 했다.
“참, 놀이터에 네 동생 있던데. 너희 엄마가 동생이랑 같이 놀라고 한 거 아니야?”
“맞아, 깜박했다. 엄마한테 걸리면 혼나는데. 빨리 놀이터로 가야겠어.”
‘아! 동생의 이름을 물어보면 되겠다!’
난 빠른 걸음으로 가는 반장의 뒤를 따라가며 동생의 이름을 물었다.
“내 동생 이름은 은혜야.”
이런. 우리 이모 이름은 은혜가 아니라 소진이다. 맥이 확 풀렸다.
“아. 내가 찾는 지혜는 네가 아니야. 진작 동생 이름을 물어볼걸.”
“정말이야? 아. 우리 엄마가 친엄마일 리가 없는데.”
반장은 나보다 더 아쉬운 표정이다. 날 이곳으로 데려온 지혜도 어깨가 축 처졌다.